더 북한 배명복시시각각

하노이, 워싱턴 그리고 평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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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미국과의 전쟁이 한창이던 중에도 베트남 북부 정권은 5000명이 넘는 젊은 남녀를 선발해 소련·동유럽·중국·북한·쿠바 등에 유학을 보냈다. 전쟁이 끝난 뒤 나라를 돌볼 인재들까지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는 고(故) 호찌민 주석의 판단 때문이었다. 전화(戰禍)에 휩싸인 조국을 등지고 유학을 떠나는 젊은이들에게 호 주석은 이렇게 말했다.

“이 전쟁에서 우리가 승리할 것은 확실하지만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너희들은 학업을 마치기 전에는 절대 돌아와서는 안 된다. 우리가 승리한 다음, 너희들은 전쟁으로 파괴된 조국의 강산을 과거보다, 세계의 어느 나라보다 아름답게 재건해야 한다. 너희들은 공부하는 것이 전투다.”(김선한 저, 『베트남 리포트』에서 재인용)

호 주석의 염원대로 그들은 베트남 재건의 동량(棟梁)이 됐다. 오늘날 그들 대부분은 각 분야 지도자의 위치에서 베트남의 개혁·개방 정책을 이끌고 있다. 앞을 내다보는 지도자의 혜안은 죽은 뒤에도 빛을 발한다.

베트남 최고지도자로서는 50년 만에 처음 북한을 방문 중인 농득마인(67) 공산당 서기장도 ‘호찌민 유학생’이다. 그는 베트남전이 본격화하던 1966년 소련 유학생으로 뽑혀 레닌그라드 임업(林業)연구소에서 5년 가까이 공부했다. 귀국 후 주로 임업 분야에서 일하다 베트남 공산당이 개혁·개방 정책인 ‘도이머이’ 정책을 당의 공식 노선으로 채택하던 86년 제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 후보로 선출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5년 뒤인 91년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권력의 핵심에 진입했고, 2001년 최고 실권자인 서기장에 선출됐다. 그의 리더십 아래 베트남은 7~9%대의 고속성장 가도를 달리고 있다.

북한과 베트남이 미국과 전쟁을 한 것은 같지만 전쟁이 끝난 뒤 택한 길은 확연히 달랐다. 베트남은 ‘실사구시(實事求是)’에 입각한 실용주의 노선을 택한 반면 북한은 ‘주체(主體)’와 ‘선군(先軍)’의 기치 아래 고립과 자주의 길을 택했다. ‘호찌민 유학생’들은 명민하게 국제 정세의 흐름을 읽고, 유리하게 이용할 줄 알았다. 개혁·개방과 탈(脫)냉전의 조류를 탔고, 종전 20년 만에 미국과 수교했다.

94년 2월 미국은 베트남에 대한 경제제재를 해제했고, 1년5개월 뒤 양국은 국교를 정상화했다. 그 배경에는 ‘과거를 잊지 않되 과거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현실주의적 감각을 가진 베트남 지도자들이 있었다. 순식간에 미국은 베트남 최대의 수출국으로 떠올랐고, 한때 미국 편에 서서 총부리를 겨눴던 한국은 베트남 최대의 투자국이 됐다.

16일 평양에 도착한 마인 서기장을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최고의 예우를 갖춰 영접했다. 순안공항에 직접 나가 그를 맞았고, 21발의 예포가 발사되는 가운데 나란히 북한군 의장대를 사열했다. 같은 날 노동신문은 사설을 통해 “마인 서기장의 방문은 양국 간 친선관계를 발전시키는 커다란 사변이자 친선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여는 것”이라며 열렬히 환영했다.

북한이 약속대로 연내에 핵 시설 불능화와 핵 프로그램 신고 조치를 마무리하면 미국은 대북 경제제재를 해제하는 것으로 돼 있다. 이어 핵 폐기까지 이루어진다면 내년 중 미국과의 국교 정상화도 가능한 상황이다. 이 시점에서 마인 서기장이 평양을 찾았고, 김 위원장이 그를 극진히 예우하고 있는 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 허울뿐인 사회주의 형제국의 의리만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하노이가 그랬듯이, 워싱턴을 통하지 않고서 평양이 국제사회로 나갈 수 있는 길은 없다. 어떻게든 워싱턴을 거쳐야 한다. 지난해 11월 하노이를 방문한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은 “역사는 길고, 사회는 변하며, 모든 관계는 언제든지 좋은 방향으로 바뀔 수 있다”고 했다. 국제사회에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다.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김일성 주석과 호 주석이 하늘에서 김 위원장의 선택을 지켜보고 있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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