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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 서가] '전염성 탐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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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1988년 2월 미국 투자은행인 뱅커스 트러스트 경영진은 혼란에 빠졌다. 자신들의 회계장부에서 표시된 투자금액 중 8천만달러가 부족한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경이적인 수익을 올려주던 이 회사 트레이더였던 앤디 크리거가 사들인 통화옵션의 가치를 잘못 계산한 결과다. 하지만 앤디 크리거는 이미 회사를 떠난 뒤였다. 뱅커스 트러스트는 증발한 8천만달러를 메우기 위해 회계 장부를 조작했다가 치명상을 입고 만다. 금융시장은 이때부터 '탐욕의 바이러스'에 감염됐다.

'전염성 탐욕'은 1980년대 중반 이후 미국에서 발생한 각종 회계 부정사건의 원인을 파헤치고 있다.

엔론.글로벌 크로싱.월드컴.롱텀 캐피털 등 90년 후반의 회계 부정사건은 뱅커스 트러스트와 마찬가지로 옵션이나 선물 등 파생상품 거래에서 시작된다. 80년대 중반 이후 대형 회계부정이 터지는 것과 파생상품 시장 규모가 커지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트레이더들은 더 많은 보너스를 받기 위해 파생상품을 직접 거래하면서 자신의 실적을 조작했고, 경영진들은 스톡옵션을 받기 위해 회사 이익을 부풀리기 일쑤였다. 그러나 회사 경영진과 주주, 감독당국은 문제가 터져 파탄으로 몰리기 전까지는 무엇이 잘못됐는지조차 깨닫지 못한다. 파생상품 거래가 워낙 복잡해 속는 자는 물론이고 속이는 자 조차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렵다. 스위스 치즈 처럼 구멍이 숭숭 뚫린 감독당국의 규제로 부정을 걸러내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

미국 샌디에이고 대학 법대 교수인 저자 프랭크 파트노이는 탐욕의 바이러스는 법규의 허점을 노리며 활동을 재개할 기회를 노리고 있다고 경고한다. 그는 법규를 아무리 꼼꼼하게 만들어도 갈수록 복잡해지는 파생상품 거래를 완벽하게 소화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대신 금융.기업인들 사이에 정직한 문화가 정착되도록 기준을 제시할 것을 주장했다.

송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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