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촛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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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김귀례(1952~) '촛불' 전문

나의 눈물을 위로한다고
말하지 말라
나의 삶은 눈물 흘리는 데 있다
너희의 무릎을 꿇리는 데 있다
십자고상과 만다라 곁에
청순한 모습으로 서 있다고 좋아하지 말라
눈물 흘리지 않는 삶과 무릎 꿇지 못하는 삶을
오래 사는 삶이라고 부러워하지 말라
작아지지 않는 삶을 박수치지 말라
나는 커갈수록 작아져야 하고
나는 아름다워질수록 눈물이 많아야 하고
나는 높아질수록 완전히 사라져야 한다



불은 우리의 기억을 따뜻하게 되살려 준다. 어둠 속에서 성냥을 그어 담배 한 개비를 물 때, 모닥불 주위에 모여 앉아 노래를 부를 때, 칠흑의 바다에서 등대의 불빛을 바라볼 때, 야간비행을 하며 사막마을의 불빛을 내려다볼 때…. 불은 춤추며 우리들 기억의 가장 아래 마을까지 내려온다. 잠시 턱을 괴고 눈을 감은 채 지나온 시간들을 돌이켜보는 것이다. 그 순간 불은 우리들 마음의 화사한 거울이 된다. 촛불은 인간의 가장 오랜 벗의 하나다. 모든 불들이 촉촉하고 따뜻하지만 인간의 방 내부에까지 함께 들어와 거주하는 불은 드물다. 불은 인간의 숨소리를 듣고 인간은 불의 숨소리를 듣는다. 생의 숨소리를 가장 잘 들을 수 있는 법. 그것은 무릎을 꿇는 일이다.

곽재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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