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로 변한 일상 … 옛이야기 샘솟는 듯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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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그림이 다가와 조곤조곤 이야기를 들려준다. 보름달 밑 낭창하게 휘어진 나무 아래 먹선으로 둥글둥글하게 그려진 남녀가 서로 보듬고 있다. 지붕처럼 울창한 나뭇가지 위에 새 한마리가 지키듯 앉아 있다. 대지 어머니처럼 푸근하고도, 소녀처럼 천진하다.

 재미화가 김원숙(54·여·사진)씨는 1972년 홍익대 서양화과 1학년 때 유학을 떠나 일리노이주립대와 동대학원을 졸업 후 미국서 전업작가로 활동해왔다. 5일부터 25일까지 서울 신사동 예화랑에서 열리는 그의 개인전에는 작가가 2년간 그린 신작 40여점을 볼 수 있다.

 “제 그림은 너무 쉬워서 오히려 당황스러울지도 모르겠네요. 제게 그림은 커뮤니케이션, 접근 가능하고 공감할 수 있어야 하는 그 무엇입니다.”

미당 서정주의 시, 삼국유사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기도 했던 그는 이번엔 일상사를 소재로 삼았다. 집 마당 연못에서 기르는 잉어, 그 잉어를 잡아먹으러 날아드는 새, 그 옆에 우거진 넝쿨 등이다. 사소한 일상은 그림 속에서 환타지가 된다. 물고기는 하늘을 날고, 넝쿨은 작가를 닮은 그림 속 여인에게 든든한 지붕이 된다. 볼수록 옛이야기가 샘솟을 것 같다.

소재도, 재료도 친숙하다. 한지에 먹선을 긋고 이걸 통째로 캔버스에 붙인 뒤 유채나 아크릴 물감으로 색을 입혔다. 떨어지는 꽃잎, 날으는 물고기도 한지에 그린 뒤 찢어 붙였다.

“그림은 대개 자화상이고 자전적이게 마련이죠. 개인적 경험을 그려도 누구나 공감하는 보편성을 띠는게 좋지 않을까요.”

그는 “현대미술의 본산인 뉴욕서 31년을 살면서 계속 쉬운 그림만 그리는데는 용기가 필요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젊어선 모래 쌓고 철사 꼽아 두는 등의 난해한 현대미술도 해봤지만 그림은 나와 관계가 있어야 하고, 내 식으로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라고 덧붙였다.

 다가서기 편해서일까. 그의 작품은 국내에서 인기가 많다. 올해 뉴욕 크리스티·소더비 경매에서도 낙찰됐다. 그러나 정작 그는 경매사로부터 “높은 가격에 낙찰됐는데 소감이 어떠냐”는 전화를 받고는 “글쎄요, 더 잘 그려드렸어야 했나 싶네요”라고 답했다고 털어놓았다.

 “손주가 넷이나 있다”고 자랑하는 나이 쉰줄의 그다. “종일 그림을 그리노라면 어깨가 빠질 듯 아프다”면서도 “제일 좋아하는 것을 하루 종일 할 수 있어 행복하다”고 한다. 02-542-5543

글=권근영 기자, 사진=최정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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