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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슈트키드의낮과밤>19.34세 여교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8면

미국 南加州大(USC)의 한국인 여교수 金恩美씨(34.사회학)는 학생들로부터 「鐵女」로 통한다.
지난해 외국인으로선 전례가 드문 서른넷의 젊은 나이에,그것도여자의 몸으로 까다로운 종신재직권(tenure)을 따냈다.
『20년만에 목표를 이뤘어요.참으로 험난한 길이었지요.』 아직 독신인 그가 걸어온 길은「성공유학」이,특히 의지력이 약한 파라슈트 키드들에게 본인의 피나는 인내와 노력 외에 얼마나 철저한 계산과 준비가 필요한지 잘 보여준다.
교수가 될 작정으로 유학을 결심한 것은 숭의여고 1년때인 74년. 당시 서울대 교수였던 아버지(金豪權.現영남대 교육학교수)와 미국 미시간大 교수였던 작은 아버지(金在權.철학.現브라운大)의 영향도 있었지만 박사학위를 위해 시카고대학에 잠시 재학하던 아버지 金교수를 따라 국교시절 2년반을 미국에서 보낸 체험이 유학을 결심하는데 현실적인 판단 근거가 될 수 있었다.또영어에 어느 정도 익숙한 장점도 있었다.
『미국 고교로 바로 유학을 떠나는 모험보다 국내에서 준비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갖춘뒤 떠나기로 계획을 세웠어요.일찌감치현지 적응을 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조기 유학들을 가지만 뜻하지 않게 생고생을 하거나 다른 길로 빠지는 위험이 너무 많거든요.』 이화여대 사회학과에 진학한 77년부터 본격 유학 준비에 나서 방학때마다 영어회화학원을 다녔고 AFKN 시청.원서동화 번역등 다양한 방법으로 영어회화 마스터와 토플.GRE(대학원 입학시험)에 대비한 공부에 매달렸다.
대학을 졸업한 해인 81년8월 미국길에 올라 그해 9월 아이비리그에 속한 명문 브라운大 대학원에 입학했다.
토플성적 6백30점.GRE 1천2백50점이란 좋은 성적에 평점 3.8점의 대학성적,특히 철저히 준비해 작성한 학업계획(study plan)이 높은 점수를 받았다.
본격적인 고생길은 그때부터 시작된다.
『스터디 그룹을 짤 때나 일상생활을 가급적 미국학생들과 어울렸어요.편하다는 이유로 한국학생들끼리만 어울리면 그만큼 적응기간이 길어지기 때문이죠.』보통 2백~3백쪽의 원서와 관련자료를독파한뒤 주1회씩 세미나를 가져야하는 과목들을 학기 마다 3~4개씩 소화하느라 주말도 없이 매일 밤을 새우다시피 해야했고 그러다보니 규정이 엄격한 기숙사를 떠나 아파트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학기가 끝날 무렵엔 과목마다 사나흘 밤을 꼬박 새워 연구서를작성해야 했다.
『지옥같은 생활이었어요.작업이 한번 끝나면 아무도 없는 아파트에 쓰러져 앓아 누우며 피눈물을 쏟았죠.』 6년만인 87년5월 28세로 사회학 석.박사 학위를 따낸 그는 넉달 앞선 그해1월 지금의 USC에 조교수로 채용된다.단 한명의 교수모집 광고에 1백명 가까이 지원한 가운데 1차 서류심사를 통과한 3명(미국인 둘 포함)은 각각 까 다롭기 짝이 없는 테스트를 한달여씩 받아야 했다.
***면접만 10여차례 치러 총장.학장등은 물론 기성교수들과10여차례 면접을 했고 교수.대학원생들을 상대로 강의실습을,교수들과의 자유토론등을 통해 학문의 깊이와 소질.신념같은 것들을심사하는 관문이었다.
그는 당당히 혼자「바늘구멍」을 통과했고 6년 뒤인 지난해 3월 종신 보장과 함께 부교수로 승진한 것이다.
지난달부터 안식년을 맞아 하버드大 초청으로 12월까지 하버드大 한국학연구소 객원교수로 활동하게된 金교수는『철저한 계획과 확실한 준비,그리고 남들보다 좀더 고생한 결과』라며『이중 한가지라도 부족했더라면 꿈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라 고 말했다.
한국학술진흥재단이 집계한 90년이후 해외 박사학위 취득자는 매년 50~60명선.
그러나 신고되지 않는 숫자까지 합치면 2백50여명씩에 이를 것이란게 교육부 추산이다.
그중 金교수와 같은 특별한 사례를 포함해 교수등으로 제대로(?)취업하는 숫자는 국내외 합쳐 1백명 미만으로 파악된다.
적어도 3분의2 정도는 경쟁에서 밀려난 채 갈 곳 없이 떠돌며 어느 단계에선가 철저하지 못했던 자신의 유학생활을 후회하고있다는 얘기다.
〈金錫顯기자〉 〈다음회는 코알라와 키위-호주유학 실태와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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