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독 물꼬 텄던 양측 정상회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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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南北韓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한 노력이 본격화되고 있는 가운데 東西화해를 통해 통일을 달성했던 獨逸의 경험을 되살펴본다.
舊동독.서독의 화해는 故 빌리 브란트 서독총리의 이른바 동방정책이 기초가 됐다.지난69년 10월28일 브란트총리는 정부성명을 통해 동독정부를 승인하는 국가와는 외교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할슈타인원칙의 폐기와 함께 1민족 2국가론을 주장하면서 동독과의 회담용의를 제기했다.
이어 70년1월 브란트총리가 빌리 슈토프 동독 각료회의의장(총리)에게「무력사용 포기선언의 교환에 관한 각료급 회담」을 제의,슈토프는 이에 대한 답신으로 동베를린에서 정상회담을 요구했다. 당시 동독은 브란트총리가 동베를린의 쇠네펠트공항으로 입국하라고 요구했으나 브란트총리는 기차편으로 서베를린에서 동베를린으로 가겠다고 맞서 결국 동독 튀링겐주의 국경도시 에르푸르트에서 양국총리가 만나기로 절충,합의했다.드디어 70년3 월19일,브란트총리가 자서전에서『내 인생에서 그렇게 감정이 북받쳤던 날이 있었던가』라고 회상했던 이날 역사적인 동서독 정상회담이 에르푸르터 호프 호텔에서 개최됐다.이날 브란트총리는 동서독이 외국이 아닌「특수한 관계」에 있다고 강조했 으나 슈토프는 이를거부하고 국제법상의 승인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날 회담에서 양측은『독일땅에서 더이상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사실에 합의했다.같은해 5월21일 서독의 카셀에서 개최된 제2차 동서독 정상회담은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났다. 그러나 이후 동서독은 우편.전화.통행등의 분야에서 관계개선을 계속,72년12월21일 동서독 기본조약을 체결하게 된다.이어 73년3월 서독 신문.방송 특파원들의 동독취재가 허가됐고 75년5월 본과 동베를린에서 양국의 상주대표부가 업 무를 개시했다.78년엔 함부르크와 베를린간 고속도로 건설에 합의하기도 했다. 81년12월11일에는 헬무트 슈미트 서독총리가 동독을 방문,에리히 호네커 동독공산당서기장과 또 한차례 정상회담을 가졌으나『선린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계속 노력하자』는 요지의 공동성명을 채택한게 고작이었다.
마지막 동서독 정상회담은 호네커가 9월7일부터 11일까지 서독을 방문해 이뤄졌다.당시 콜총리는『우리는 양국간 국경을 인정하지만 평화적 방법으로 분단을 극복하길 희망한다』라고 말해 평화통일의지를 피력했다.그러나 독일의 통일은 잘 알 려진대로 이어 전개된 舊蘇聯과 동유럽의 대변혁,동독주민들의 민주혁명과 베를린장벽의 붕괴,그리고 미국등 2차대전 4대 전승국들의 승인등을 통해 90년10월3일 급작스레 이뤄졌다.이렇게 보면 최초의동서독 정상회담에서 통일까지는 무려 20년의 세월이 걸렸다.동서독의 정상회담이 직접 통일로 이어진 것은 아니지만 이같은 정상회담을 계기로 동서독의 교류가 늘어나 결국 통일의 밑거름이 됐다는 사실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베를린=劉載植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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