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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라도 배운다(「파라슈트키드」의 낮과 밤:7)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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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조기유학생 어학원서 장기 씨름/승급못하면 창피해 “떠돌이 유학”/조기유학생 명문대 교포학생에 고액과외
『오늘 이사하는 날이라 전화가 끊겼는데요. 전화좀 빌려 쓸 수 있을까해서요.』
A상사 LA지사 윤모씨(43)가 사는 월셔지역 3층짜리 아파트. 7∼8개월쯤 2층에 함께 살면서 낮을 익힌 A양(21)이 종종 함께 지내는 모습을 보였던 남자친구와 함께 짐을 대강 옮기곤 윤씨를 찾아왔다.
『저어,냉장고는 친구들을 불러 내일 옮기려고 오늘은 그냥 남겨두고 가려는데 아저씨가 관리인에게 대신 허락좀 받아주시면 안될까요.』
「1층에 관리실이 있어 내려가면서 이야기하면 될텐데…」 의아하게 생각하면서도 윤씨가 전화를 걸어주자 고맙다는 인사를 남긴 A양은 문앞에서 기다리던 남자친구에게로 돌아서며 혼잣말처럼 나지막이 되뇌었다.
『아하,리프리­저…레이터. 냉장고가 리프리저…레이터란 말이지.』
윤씨가 살던 아파트로 이사오기전 뉴욕에서도 1년간 어학원에 다녔다는 A양. 유학생활 1년반여동안 냉장고란 뜻의 리프리저레이터(Refrigerator)란 단어를 익히지 못했던 것이다.
조기유학 등 유학생이 늘면서 A양처럼 한인타운이 형성돼 있는 LA나 뉴욕의 어학원을 전전하며 수년동안 학생신분을 유지하는 어학연수생도 많다. 이들은 한국 유학생 사이에서 「붙박이」로 통한다.
알파벳만 알고 시작하는 1등급에 등록해도 한달에 1등급씩 1년만에 12등급 전과정을 마치도록 짜여있는 미국 어학원에서 3,4등급부터 출발한 이들이 1∼2년이 넘도록 중간수준인 6∼8등급을 넘지 못하고 오랫동안 한등급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는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풍족한 돈 씀씀이가 특징인 이들은 또 「동서유학파」라고도 불리는데 한 어학원에서 1년여가 지나면 「체면상」 동부에서 서부로,서부에서 동부로 옮겨 다니기 때문. 영어를 배우러 왔으면서도 유독 한국학생이 몰려있는 어학원만 골라 다니고 유학생이 적은 중부·남부는 기피한다.
미국 전역에 14개 체인어학원을 가진 뉴저지 러더퍼드의 페어레이 디킨스대학 부설 어학연수원은 H그룹 회장 아들이나 L그룹 회장 손자가 다녔던 어학원으로 유명하다.
기자가 이 어학원을 찾은 5월27일부터 한달간(4월30일∼5월27일) 등록한 1백88명을 살펴보니 무려 39%가 넘는 75명이 한국학생이었다.
이같은 한국인 유학생의 어학원 점령(?) 사태는 미국의 이 연수원만이 아니다.
1년동안 8단계 과정을 거치도록 하면서 입학수속후 인터뷰와 필기시험을 통해 반 배정을 하는 호주 시드니 H어학원도 98명중 60명이 한국인 학생이고 이중 21명은 고졸이하의 조기유학생.
5월19일 오후 9명이 출석해 오전과정 마지막 수업을 받고 있던 비기너Ⅱ반(초보반)은 8등급중 2등급. 12명이 정원인 이 반은 어학원에서 1년간 영어연수를 하는 조건으로 호주 사립고교의 가입학 원서를 받고 유학온 P군(16)을 포함,모두 7명의 한국 학생이 끼어 있다.
○수년씩 다니기도
비기너반에서 만난 P군은 지난해 6월부터 11개월재 이 반에만 머물러있는 최고참이다. 중학교 2학년을 마치고 자퇴,유학길에 올랐다는 P군은 어젯밤부터 새벽까지 2개의 비디오테이프를 연속 시청하다 잠든 탓에 지각을 했다.
수업시간내내 질문은 커녕 선생님의 질문에 마지못해 대답을 해나가던 P군은 오후 2시45분 수업이 끝나자 총알같이 어학원을 빠져 나간다.
「영어라도 배운다」는 막연한 기대로 너도나도 조기유학에 나서면서 LA·뉴욕 등지에선 미국 현지에서 한국식 영어과외까지 하는 신풍속도 등장했다.
방학때면 조기 유학생들이 명문대 교포 재학생에게 영어 고액과외를 받는다는 소문을 현지취재 도중 듣고 수소문 끝에 찾아낸 미국 동부 아이비리그의 명문대 대학생 K군(24)을 만난 것은 5월28일.
『여름·겨울방학 넉달동안 과외시켜주고 2만5천달러(약 2천만원)을 벌었다면 믿을 수 있겠어요. 이번 여름방학엔 1만5천달러를 받게 돼요.』
친구들로부터 「과외재벌」로 불리는 그는 3학년을 마친 이번 방학(6∼8월)에도 13일부터 8월20일까지 두 형제의 합숙 과외비로 1천2백만원을 받기로 계약돼 있다며 입을 뗀다. 『저는 잘 모르지만 아버지가 서울에선 누구나 아는 빅샷(big shot·유력인사라는 뜻)이래요. 형은 LA의 사립고 12학년(고3)에 올라가고 동생은 이번에 왔어요.』
K군은 이들 형제가 사는 LA지역 오렌지카운티의 빌라형 콘도에 함께 기거하면서 큰 아이는 대학진학을 위한 SAT(Scholastic Aptitude Test·우리의 수능시험격) 준비로 영어·수학을 중점적으로 돌봐주고 동생은 영어를 가르치기로 돼있다.
『처음엔 자격증까지 있는 미국 과외선생에게 배웠는데 효과가 없었나봐요. 저는 한국말로 잘 가르쳐 주는데다 방학때 보호자 역할까지 해준다고 벌써 용돈까지 1천달러나 받았는걸요.』
○치맛바람 미 상륙
그가 고액 과외교사가 된 것은 2학년 겨울방학때인 지난해 1월.
방학때면 부모가 살고 있는 LA의 집으로 오는 K군은 92년 여름방학 아르바이트로 한국인이 운영하는 LA의 과외학원에서 한달에 2천달러의 강사료를 받고 교포학생들을 지도했다.
『새 학기가 시작된 어느날 학원에 다녔던 조기 유학생 장모군 엄마가 전화를 했어요. 영어를 가르쳐주면 4천달러를 준대요. 좋다고 했죠.』
그는 대학원 진학 준비를 해야하는 내년에도 계속 과외선생을 하고픈 유혹 때문에 고민중이라고 했다.
『현지인이나 교포들은 상상도 못한 치맛바람이 상륙해 휘젓고 있습니다. 하버드나 예일대 등을 간판으로 한 교포학생들이 엄청난 몸값의 스카우트 열풍에 휘말리고 있어요.』
LA에서 지난해까지 과외학원을 운영했던 유모씨(56)는 『교포학생들을 끌기 위해 명문대생 강사를 초빙해 놓으면 조기 유학생 부모들이 목돈에 승용차까지 사주며 빼내갔다』고 개탄했다.<김석현·권영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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