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고아들 보은의 잔칫상/경남 진양보육원 매년 모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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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어머님,이제 우리 사랑받으세요”/으젓하게 가장·주부된 50여명/길러준 전 보육원장 찾아 큰절/6·25때 아들 잃은뒤 400명 거둬 보살펴
현충일인 6일 부산시 사하구 다대2동 다대사회복지관에서는 기른 정에 감사드리는 눈물의 잔칫상이 차려졌다.
경남 진양군 문산면 진양보육원 출신 원생들이 고아라는 이름의 오갈데 없던 자신들을 거두어 길러 주신 「어머니」 김경연씨(64·진양보육원 전 원장)를 모시고 보은의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이날 서울·부산·대전 등 전국에서 모인 50여명의 「아들」 「딸」들은 백발이 성성한 어머니의 깊게 팬 주름살을 펴드리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잔병치레가 심해 몇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어머니의 가슴을 아프게 했던 전쟁고아 「경태」(현재나이 48세)와 밤마다 아빠 얼마를 찾으며 보채다 등에 업혀 잠이 들던 「은표」(30)도 이제는 의젓한 가장이 되어 며느리와 함께 어머니 품에 안겼다.
60년대 포대기에 싸여 길에 버려져있던 「선희」(34·강화도),주부가 되어 돌아온 그 선희가 눈물을 글썽이며 음식을 권하자 어머니는 끝내 참았던 눈물을 쏟고 말았다.
해방되던 해인 45년 5월 진주에서 15세 새색시가 된 김씨는 일곱살 위인 남편 김광우씨(68년작고)와 과자도매상을 하며 단란한 가정을 꾸렸다. 그러나 신혼 5년만에 6·25로 첫 아들을 잃고 집과 가게마저 불타 인근 농촌마을인 문산면 소문리로 이사했다. 이때부터 첫 아들을 못잊는 남편은 귀가할 때 마다 전쟁고아를 데리고 왔다.
『피붙이 6명도 모두 고아로 키웠지요. 남편은 국교생이던 장남이 생활기록카드를 적을 때도 부모이름을 기록하지 못하게 하고 고아들과 함께 모두 친자식처럼 키우도록 했습니다.』
전쟁후유증과 보릿고개 등으로 아들·딸이 50여명으로 불어나자 김씨부부는 56년 재단법인 인가를 받은데 이어 62년부터는 기독교 아동복리회로부터 양곡과 헌옷지원을 받기도 했으나 헐벗고 굶주리기는 마찬가지였다.
김씨 부부는 자갈밭을 일궈 농사도 짓고 쌓인 빨랫일과 쇠약한 자녀들의 병간호는 물론 칭얼대는 어린 아들·딸을 업어 재우느라 거의 매일 뜬눈으로 지샜다.
그런 한편으로 닭·돼지 등 축산농장과 채소장사를 하는 등 피땀흘린 덕분에 60년대 중반에는 자급자족이 될만큼 고아원 사정도 호전됐고 생활이 어려운 이웃 모자세대 1백여명까지 도울 수 있었다.
그러나 남편이 68년 고혈압으로 세상을 뜨고부터 김씨는 고아원 운영과 어린 아들·딸의 뒷바라지를 혼자 떠 맡게돼 참으로 말못할 고생을 감당해야만 했다.
1백20여명으로 불어난 대가족의 입에 풀칠하는 것도 해결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진학한 아들·딸들의 뒷바라지와 「고아」들에 대한 따가운 눈총을 이겨내도록 보살피는 일에 더 마음을 졸여야 했기 때문이다.
72년 아버지의 유지에 따라 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한 장남 김진세씨(45·다대사회복지관장)가 보육원을 돕기 시작할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김씨는 회고했다.
보육원은 85년 진양군의 시범영농육아원으로 선정돼 현재의 대평면 내촌마을에 농지 4천평을 일구고 건평 2백40평 규모의 보육원을 신축,이듬해 이전했다. 진양보육원을 새 보금자리로 옮긴뒤 문산면 옛 보육원자리에는 경로식당을 개설,독지가와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을 받아 1백여명의 노인들에게 3년째 무료급식을 하고 있다.
진양보육원에서 자라 출가한 아들·딸들은 모두 4백여명.
주로 명절때 어머니를 찾아뵙던 이들은 3년전 어머니의 회갑때 매년 모임을 갖기로 하고 진양보육원 시절 뛰놀던 동산을 그리며 「동산회」를 결성,이날 부산에서 첫 모임을 갖게 됐다.
동산회장 허만태씨(50)는 『어머니의 뜻을 이어 앞으로 이웃사랑운동을 펴 나갈 것』이라고 말하고 『홀로 삶을 개척하느라 소식이 끊긴 형제들을 모아 어머니의 은혜를 다시 새기고 서로 돕고 이끌어 갈 계획』이라고 밝혔다.<부산=허상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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