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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관열전>11.70년대 수출號 선장 前상공장관 張禮準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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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임자는 수출 1백억달러를 달성해야 해.』 李洛善장관 후임으로 73년12월4일 상공부장관 임명장을 받은 張禮準씨(70.現삼신 올스테이트생명보험회장)는 오찬자리에서 朴正熙 당시 대통령으로부터 이같은 한마디 당부말을 듣는다.
73년 당시만해도 1년 수출액은 32억달러였기 때문에 1백억달러는 사실 아득한 수치였다.
이 목표는 그때부터 張씨가 상공부장관을 그만둔 77년말까지 4년1개월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고민거리가 됐다.
그는 중화학공업화를 통한 목표달성 전략을 세웠다.
연도별 수출목표 달성에 급급하던 체제를 장기수출체제로 개편하고 이를 위해 수출산업의 재편성,국제수준의 수출환경 조성,공업기술의 혁신을 추진했다.참모진이 沈宜煥차관,金東圭.朴弼秀.金善吉.劉珏鍾.安永哲.金燦東차관보등「강팀」으로 구성된 점도 큰 도움이 됐다.
양주를 글라스에 마실 정도로 대통령에게도 인정받는 호주가였던張장관은 술을 이용해서도 조직을 장악해 나갔다.
차관보와 1대1로 가서 끝장볼 때까지 술을 마셔 한 차관보는여자고무신을 신고 도망간 일이 있을 정도였고 다음날 일찍 나와해당간부의 출근을 인터폰으로 확인,부하들을 꼼짝못하게 했다.
그는 메모가 꼼꼼한데서 나타나듯 실무형이고 과묵.신중한 반면보스기질이 있었다.
이는 그가 학창시절 고려대를 대표하는 李哲承씨,연세대 李東元씨(前외무장관)와 어깨를 겨룬 서울상대 학도호국단장 경력과 무관치 않다고 주위에서는 평한다.
당시 상공부의 한 간부는 張씨가 술이 들어가면『너는 내 부하이니 하라는 대로 해』라곤 했었다고 술회한다.그는 상공장관이 된 직후 수출 품목별로 매일 대책회의를 가졌다.보고받을 때 그는「사냥꾼 토끼몰이」식 스타일로 유명했다.「그래서 」「그런데」식의 끝없는 추궁이 이어진 것이다.
그는 과장급을 장관실로 하나씩 불러 깐깐이 챙기는 스타일이었고 점심시간에는 약속을 안하고 방에서 식사하며 서류를 뒤지곤 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화학공업국의 한 보고가 모호하고 결론이 없자 결재서류에『술 아니면 물,물 아니면 술 식의 보고는 지양할 것』이라고 써넣은 것이다.
張장관은 이어 수출號의 선장으로서 대기업들을 수출전선으로 밀어넣기 시작했다.
그는 대그룹의 오너들을 일부의 거부감에도 불구하고 한명씩 상공부로 불러 1백억달러 수출 달성에 대한 정부의 의지를 전달하고 협조를 요청했다.상공부는 매달 朴대통령 주재로 중앙청 중앙홀에서 성대하게 열리던 수출진흥확대회의를 통해 기 업의 애로사항을 해결해 주었다.
금융.세제 정책수단을 갖고 있는 재무부와의 씨름이 그때에도 큰 문제였으나 朴대통령의 輸出入國 의지가 상공부에는 최대의 援軍이 됐다.張장관은 당시 회의석상에서 金容完 全經聯회장과 중소기업연합회 金奉才회장(작고)의 직설적 건의가 많은 도움이 됐다고 술회한다.
한국은행 행원.부흥부 과장을 거쳐 駐美 한국대사관 참사관을 지낸 덕으로 영어에 능통했던 그는 또 당시로서는 불모지였던 통상외교를 본격화시켰다.그때만해도 통상협상은 미국과의 사이에서나있을 정도였지만 그는 시장개척차원에서 동남아.유 럽.중동.아프리카 각국을 거듭 방문,교역확대의 길을 열어 나갔다.
親北韓 정권이었던 버마의 상공부장관을 국내로 먼저 초청,환심을 산 뒤 한국 장관으로서는 처음 버마를 방문해 교역확대를 시도,74년 40만달러 수준이었던 양국교역이 2~3년만에 1천만달러선으로 늘어나는등의 실적도 있었다.
74년은 세계적인 오일쇼크와 스태그플레이션으로 한국경제도 충격에 휘말려 있었지만 수출은 잘돼 목표 45억달러를 초과한 47억달러를 달성했다.전년대비 45%나 수출이 늘어난 것이다.
張장관은 75년에는 오랜 숙원이던 종합무역상사 제도를 도입하는데 성공했다.그는『우리의 마케팅조직이 취약했고 중소기업들이 각자 수출을 하려면 애로가 많을 뿐 아니라 과당경쟁도 생겨 종합무역상사를 지정,육성해 국제화된 마케팅조직으로 활용하려 했다』고 말한다.
종합상사는 재벌그룹의 창구가 돼 수출규모 확대를 위한 과잉경쟁으로 수출의 내실을 다지는데 역작용 하기도 했지만 수출 1백억달러를 달성하는 견인차가 되었다.
75년에는 수출여건이 악화돼 수출업체와 수출유관기관들이 일요근무까지 하는 비상작전을 펴고 3개「移動상공부」가 만들어져 전국을 돌며 수출을 독려했으나 목표인 60억달러를 달성하지 못했다.수출이 54억달러에 그쳐 분위기가 침통했다.
張장관은 76년부터 세일즈단을 전세계에 내보내고 수출지원책도강화하는등 총력체제를 가동시켰다.76년에는 목표인 65억달러를뛰어넘는 81억달러의 수출이 이루어졌다.그 여세로 77년12월22일에는 그렇게도 갈구하던 1백억달러 수출이 달성됐다.목표인80년을 3년 앞당겨 이루어낸 개가였다.
朴대통령은 감기가 심해 22일 1백억달러 돌파기념 수출의 날행사에 참석하지말라는 주치의 권유도 뿌리치고 행사장에 달려와 감격어린 치사를 했다.
張장관은 그 이틀전 신설된 동력자원부장관으로 발령났으나 행사장에서 부총리보다 앞자리에 앉는 배려를 받았다.그는 대통령으로부터 별도의 공로패도 받았다.
이 과정에서 지나친 수출드라이브로 성장위주의 경제를 운용하고자원배분이 한쪽에 쏠리는데다 분배가 왜곡된다는 비판도 따랐다.
張 前장관은 朴대통령의「술친구」이기도 했지만 성실성을 인정받아 역대 각료중 유일하게 3개부처 장관을 쉬지않고 연임한 기록을 남겼다.
그는 4년반동안 농림수산부 및 경제기획원 차관을 지낸데 이어72년1월부터 73년말까지 건설부장관을 지냈고,그 다음 상공부장관을 역임한 뒤 77년12월에는 곧바로 동자부장관이 돼 79년말까지 재임했다.장관만 8년 한 것이다.그는 5.16주체들과인연이 없었으나 경제기획원 차관이던 71년 여름 金鶴烈부총리가와병상태에 들어가면서 국정감사.예산심의등을 꿋꿋이 치러내 대통령의 신임을 얻은 것으로 전해진다.
건설장관 시절 그는 당시에 마지막 大役事로 불린 호남.남해고속도로 현장을 보름에 한번씩 방문하는등 심혈을 기울여 완공시켰다.팔당댐.소양강 다목적댐.남해대교.국내 첫 임대아파트등이 그의 임기중 완공됐다.
***出張가도 아령운동 朴대통령은 대형 건설현장 방문이 잦아그에게는 대통령을 가까이 할 기회도 됐다.
상공장관때 1차 석유파동 속에서 석유 메이저를 통하지않고 中東 국가로부터의 原油 직도입을 성사시킨데 이어 2차 석유파동때동자부장관을 하면서 종합에너지 수급계획,장기 電源개발계획을 만들고 석유비축기금을 도입했다.
그는 그러나 경제장관회의등에서 부처간 견해가 엇갈릴 때 意中을 나타내지 않는 포커페이스 자세를 유지,『너무 조심한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그는 오랜 장관생활중 후회되는 점은 건설장관 시절 서울의 도시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도시계획 마스터플랜을 세우지 못한 것이라고 털어놓았다.
장관시절 팔씨름을 당할 사람이 없는 장사였으며 해외출장 때도아령을 들고다닐 정도로 아령운동을 평생하고 있다.골프는 골프칼럼을 연재했을 정도의 수준급.
80~82년 사우디아라비아 대사로 있을 때는 현지 관습에 따라 콧수염을 길러 화제가 되기도 했다.
〈金 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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