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 사실이 「기밀」이라니…(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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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대법원이 국가보안법상의 국가기밀누설죄에 대해 종전의 판례를 따르는 보수적인 입장을 고수한 것은 국민다수의 법감정이나 정서에는 걸맞지 않은 것 같다.
지난해 10월 1심은 황석영피고인에 대한 판결에서 국가보안법상 국가기밀누설죄로 처벌할 수 있으려면 제공된 정보가 「기밀로서의 실질적인 가치가 있는 정보」여야 한다고 밝힌바 있다. 2심에서도 그대로 받아들여진 이러한 판단은 국민 법감정상 대체로 상식선에서 납득이 가는 내용이었다.
뿐만 아니라 시대의 변화에 따라 현재 국가보안법 그 자체의 개정 또는 폐지 여론이 국내외에서 줄기차게 제기되고 있다. 또 지금은 핵문제로 인해 남북관계가 소원해져 버렸으나 이미 남북합의서가 제결된바 있고,남북교류법이 발효중이며,헌재에 의해서도 국가보안법이 한정합헌이란 결정이 나온 마당이다.
상황의 변화가 이러하다면 판결도 좀더 융통성있는 해석에 바탕을 두는 것이 바람직했을 것이다.
「국가기밀」이라고 할 때는 누구나 공지되지 않은 사실일 것으로 상정한다. 그런데 「아무리 널리 알려진 공지의 사실이라도 북한에 유리한 자료가 되고 대한민국에 불이익을 초래할 수 있는 것』으로 그것을 해석한다면 기밀이라는 것이 따로 없는 셈이 된다. 이것이 과연 국민의 상식과 법감정에 맞는 것일까. 국가보안법이 개정 또는 폐지되어야 한다는 여론이 커가고 있는 것도 바로 사법부의 판단마저 이렇듯 기계적인 입장을 고수하기 때문이다.
심급마다 법해석이 같아야 한다는 법은 없다. 그러나 이번 문제와 같이 정치적·사회적 파장이 큰 사안에 대해 사법부가 심급마다 전혀 다른 판단을 한다면 국민으로서는 당황할 수 밖에 없고,사법부의 판단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주요문제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는 제도적 장치는 없는 형편이나 최소한 비공식적으로라도 그를 위한 노력이 있었어야 했을 것이다.
특히 우리는 대법원이 이번과 같은 중대한 문제를 판단하기 위해 전원합의체를 왜 구성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을 금할 수 없다. 대법원은 지난 92년 국가보안법 제7조(고무·찬양 및 이적표현물 제작·반포)에 대한 판결에 있어서는 전원합의체에 회부해 판결을 낸바 있다.
전원합의체에 회부했다해서 꼭 기존 판례가 깨지라는 법은 없다. 그러나 전원합의체에 회부했다는 자체가 대법원이 문제의 중대성을 인식했다는 증거는 되는 것이며,그러한 진지하고 고심어린 노력끝의 판단이라면 기존 판례를 유지했더라도 현재의 법과 제도상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기가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대법원은 그러한 성의를 보여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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