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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분야 좌담(전환과 왜곡 5·16유산 재조명: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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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힘의 지배… 합리·도덕·경제성 상실/소수 인치… 국회 제도적 장식품 전락/정통성 시비속 공작·보복정치 활개/정책부재로 독재­반독재 구도일관/경제·사회성장 발목만 잡은 정치/김 대통령 개혁의지 불구 비전 불명/3권분립·부정·분배가 변화의 과제
□참석자
▲김호진 고려대 교수
▲안병영 연세대 교수
▲이정복 서울대 교수
▲사회:송진혁 수석논설위원
▲사회 송진혁 수석논설위원=한국의 정치는 여러가지 과제들을 안고 있습니다. 중요한 국정현안들에도 불구하고 국회가 무기력증에 빠져있다거나 정계의 부패가 여전하다거나 하는 문제들을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또 정치인의 자질,정당기능 등 얘기하자면 하나 둘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같은 문제들은 현재의 모습으로만 볼 수 없습니다. 오늘의 문제들을 가져온 과거의 인자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한 문제가 어디서 왜 왔는지를 짚어보는 원인분석은 정치적인 과제들의 극복을 위해 바람직한 일일듯 싶습니다.
▲이정복 서울대 교수=한국정치의 후진성은 선진국의 정치문화와 비교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한국정치가 후진국들에 비하면 과거 반세기동안 꽤 업적을 거두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그러나 선진국의 정치력이나 정치의 역할을 염두에 둘 때 우리 정치는 대단히 불만스런 상태입니다.
또 하나는 한국정치가 다른 분야보다 낙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경제·교육·사회분야는 80,90년대를 거치면서 상당히 발전했습니다. 과거에는 정치가 이들 분야를 주도했지만 이제는 달라진 것 아닙니까. 옛 틀은 맞지 않는데 아직까지 새로운 틀이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치가 발목잡는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습니다.
○혼탁선거 비효율
▲김호진 고려대 교수=지난번에 타결된 선거법 등의 정치개혁입법이 지지를 받은 것도 그런 공감대가 바탕이 된 것 같습니다. 정치의 낙후성에 대한 심리적인 반사작용이지요.
좀더 구체적으로 낙후성을 분석해 보자면 한국정치의 기능성과 윤리성,그리고 경제성의 문제점을 따질 수 있겠습니다.
우선 기능면에서 정치가 해야 할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대의기관으로서 이익결집이나 갈등해소 등의 일들은 정치가 할 일 아닙니까. 그간 정당과 의회활동에서도 볼 수 있었듯 우리 정치는 그런 역할이 부족했습니다. 예를 들자면 국회의 극한대립,흑백대결,정경유착,일방통행식 의사진행,거기에 곁들여 공작정치도 한몫했습니다. 정당의 사당화나 권위주의적 성격,의회에서 다수당의 횡포 등은 한국정치의 낙후성을 말해주는 증후군들입니다. 다음에 우리 정치는 윤리적으로도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지난해의 재산공개 파동이나 노동위의 돈봉투 파문,또 농협 비자금 문제 등에서 여실히 드러났습니다. 한마디로 정치의 도덕성에 관한 문제입니다.
셋째로 경제적으로 대단히 낭비적인 정치풍토가 큰 문제입니다. 선거의 혼탁풍토는 엄청난 정치비용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기능성면에서 기업은 대단히 생산적입니다. 요즘은 정치인과 공무원들의 대기업에서 연수를 받고 있지 않습니까. 기업에서 중시하는 경영의 합리화나 효율성이 정치에서는 거의 도외시되고 있습니다. 정당도 경영개념으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효율성이 떨어집니다.
중앙당과 지구당의 유급당원들은 기능적으로 실업상태이지만 급료상으로는 취업으로 잡혀있는 인원들이 많습니다. 그만큼 놀고 먹는 사람들이 많다는 얘깁니다.
▲사회=일전에 중앙일보가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지지정당이 없다는 답변이 40.8%로 가장 많았습니다. 한국정치가 그만큼 국민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한국정치의 낙후성을 가져온 원인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안병영 연세대 교수=저는 그 원인을 세개의 위기개념으로 설명해 왔습니다. 한국정치의 낙후성은 통합의 위기,정당성의 위기,발전의 위기 등 세가지 위기가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먼저 통합의 위기는 분단의 위기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는 남북한의 오랜 대결상황에서 비롯된 것으로 동질적 체제 이데올로기,집권적·방위적 구조,안보가치의 우선 등이 바로 이 통합위기의 산물입니다. 국가예산의 30% 가까이를 국방비로 써야하는 현실,혁신정당이나 노조가 성장할 수 없었던 상황이 모두 이 위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다음으로 정당성의 위기입니다. 문민정부가 들어선후 정당성 위기는 많이 해소됐다고 보아야겠죠. 이 위기는 그간 역대정권이 권력을 창출·유지하는 과정에서 민주적 규범과 절차를 지키지 못한데서 연유합니다. 때문에 정치다툼이라는 것이 오랫동안 민주대 반민주의 구도로 짜여졌으며 체제논쟁 등 본질적인 문제를 둘러싸고 싸웠습니다. 억압과 항쟁의 악순환이 계속되었고 여기서 비롯되는 정치비용도 엄청났습니다. 서구의 경우 의회정치의 쟁점으로 부상한 것이 주로 민생과 연관된 경제·사회적 이슈들이었습니다.
○안보내세워 강압
세번째는 발전위기입니다. 오랫동안 모진 가난속에서 시달려왔기 때문에 군부 권위주의정권은 정당성의 결손을 메우기 위해 정부주도적 경제발전전략을 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른바 개발연대로 불리는 60∼70년대를 지나면서 놀라온 경제성장을 이룩했습니다만,급속한 경제발전은 빈부격차·경제력집중·민중부문의 박탈 등 적지않은 역기능을 수반했습니다. 여기서 비롯되는 사회적 불평등과 갈등은 한국정치에 새로운 숙제를 던져주었습니다.
이들 세가지 위기는 한국정치 낙후성의 원천이자,한국정치가 풀어야 할 숙제라고 생각합니다.
▲사회=김정부의 등장으로 여러 개혁조치가 진행중이나 아직 미진한 것은 무엇일까요. 더욱 변화해야 할 것들 말입니다.
▲이 교수=50여년간 쌓여온 부정·부패도 일거에 없애기 어려운 과제입니다. 거기다 분배가 현 정권이 해결해야 할 주요과제입니다.
또 인치보다는 정치제도와 구조가 우선 마련되어야 합니다. 대통령제하에서는 그것이 바로 3권분립입니다. 3권분립의 틀이 제대로 갖춰지고 그 틀내에서 자유롭게 정치가 이뤄지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명목상으로만 삼권분립일뿐 실제는 일권체제라고도 느낄 현상들도 나오잖아요.
▲김 교수=우리는 그간 대통령이나 정부가 정치를 전담하는 것이며 그것이 정치의 실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러나 정치가 여러 욕구를 입법으로 구현하는 하나의 메커니즘이라고 볼 때 우리 정치는 낙후와 실종을 면치 못해왔습니다.
▲사회=그래서 학생이 정치의 주요 요소로 등장한게 아닙니까. 재야도 거리로 나가 정치는 제도권 밖으로만 몰려갔습니다.
○학생들 참여 빌미
▲김 교수=그렇습니다. 정치가 제도권을 이탈해 민주대 반민주 구도로 가면서 재야와 학생의 정치참여라는 변이현상이 등장했습니다. 이 틈을 비집고 안기부의 공작정치마저 만연해 위기를 가중시켰지요.
이제 이같은 변이현상은 청산의 계기를 맞았습니다. 그러나 정치의 선진화를 위해서는 첫째 정치질서의 제도화가 중요합니다. 두번째로 제도를 경영할 수 있는 지도세력이 형성돼야 합니다. 정계개편이든 물갈이든 말입니다.
▲안 교수=저는 한국인들이 정치를 보는 눈이 정치의 성격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한편으론 정치는 더러운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그것은 무소불위한 것,무엇이든 다할 수 있는 별세계라고 생각합니다.
평소에는 정치인은 시정잡배만도 못하다고 매도하다가도 어디서 정치인을 만나면 굽신대고 접근을 꾀하는게 바로 그것입니다.
많은이가 정치를 혐오하니까 우수하고 지적인 사람이 정치판으로 들어가기를 꺼리는 풍조가 있습니다. 또 일단 정치에 손을 대면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갔다고 생각하니까 권력의 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온갖 짓을 다하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정치가 벌거벗은 권력의 무대가 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정치를 보다 일상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누구나 정치를 할 수 있고 또 정치를 하다가 본래의 자기 영역으로 되돌아올 수도 있을 때 정치는 정상궤도에 오를 수 있을 것입니다.
○비상시도 침묵뿐
다음 정책결정구조와 과정의 문제입니다. 지난 군부 권위주의시대에 정책결정은 아주 간단했습니다. 막강한 힘을 가진 대통령과 그 주변의 청와대 비서관,그리고 정부의 고위 기술관료가 대부분의 주요정책을 구상하고 결정했습니다. 정당·의회는 제도적 장식품이었고 이익집단도 제구실을 못했습니다. 이제 보다 민주화·다원화·분권화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교수=대표적 정치인인 의원들이 제도적으로 할 일이 없습니다.
정책에 대해 왈가왈부할 분위기도 아니고 여당은 손만 들면 되고 야당은 비리폭로나 하고 신문에 이름 석자나 내려 합니다. 한마디로 국회에 권한이 없습니다.
▲사회=국회가 법률적으로는 다 할 수 있도록 되어있는데 의원들이 말을 안합니다. 어젠더(Agenda) 제기를 안하는 셈이지요. 가령 물가가 오르거나 북한이 노동1호 미사일을 만들면 즉시 상임위를 열어 말을 해야 하는데 침묵이 상책이라는 소극적 자세들입니다.
▲이 교수=아직도 우리는 정책결정의 권한이 관료에게 있습니다. 능력있는 사람이 정치인이 돼야 하는데 이들이 진출하도록 되어있지 않습니다. 이는 완전한 권력중심정치,권력을 중심으로 이합집산하는 정치를 야기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회의 발전방향은 보다 전문화·다원화하고 있습니다. 정치권력도 이에 맞춰 일권구조가 아닌 다권구조가 되어야 합니다.
▲김 교수=그것은 국가발전단계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초기의 국가건설은 국가나 정부 중심의 산업화를 통해 이루어지고 이때는 정치가 경제·사회를 찬탈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회가 다원화되고 시민권의 목소리가 커지면 시민사회의 정치적인 목소리도 강화되어 갑니다. 현재 한국의 정치와 사회는 과거의 역기능에서 순기능으로,비관에서 낙관으로 서서히 이행하는 과도기로 볼 수 있습니다. 국회가 힘이 없다고들 하지만 법적으로 우리 국회의 권한은 상당합니다.
과거에 비해 국정감사와 조사권을 갖고 있고 각료의 해임건의권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게 무력해졌습니까.
지난 실명제나 재산공개에서 망에 걸린 것도 한 원인입니다. 그게 집권자의 레이더망에 걸렸기때문에 보이지 않는 손의 조종대상으로 전락한 것입니다. 의원들은 우선 자기 생존이나 보존에 치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공천권을 쥐고 있는 사람을 무시할 수 없고 따라서 당명에 충실하지 않을 수 없는거죠. 선거구민들의 심판기준이 정책적 관점이 아니라 연고나 개인이익의 관점에 따라 좌우되는 선거문화도 문제입니다. 이런 요인들로 결국 국회는 제구실을 못하는거죠.
▲안 교수=우리의 경우 공론화 과정이 실종된게 심각한 문제입니다. 하나의 예를 들죠. 1941년 2차 세계대전의 와중에서 영국은 전황이 극도로 불리했습니다. 웨스터민스터 홀 근처까지 베를린에서 쏘아대는 박격포탄이 떨어질 정도였으니까죠. 그런데도 불구하고 의회는 비버리지위원회를 구성하고 전후 영국형 복지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청사진을 만드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수백회의 공청회를 거치면서 마련된 보고서는 베스트셀러가 됐고,이런 공론화과정이 영국인에게 용기와 희망을 심어주었습니다. 우리 경우는 어떻습니까. 어렵게 공청회 한번하고는 공론화를 거쳤다고 큰소리 치지요. 시민포럼이나 공익단체의 토론회 등이 의회의 입법과정과 접목될 필요가 있습니다. 공론화과정에서 언론의 역할은 더 말할 나위가 없고요.
▲사회=돌이켜보면 정치에서 공론화과정이 없어진 것은 10·2항명 파동이 하나의 계기가 아니었던가 생각됩니다. 공화당 4인체제가 오치성 내무장관의 해임안을 가결시키자 의원들을 불러 중앙정보부에서 때리고 탈당시켰습니다. 이것이 정치공론화 과정을 사라지게 한 분수령이 아닌가하는 것입니다. 그전에는 그래도 정치적 이해관계가 다른 집단간에 토론과 경합이 있었으나 그 이후로 일색주의가 됐습니다.
▲이 교수=박 대통령은 그래도 개인적인 능력이 있었습니다. 두가지 대안중 고민하고 결정했습니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은 아래에서 가져오면 그냥 재가하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행사에 참여하는데 언제 정책결정할 시간이 있었겠습니까. 전·노 전 대통령은 한마디로 세리모니얼 프레지던트였던 것입니다. 문민대통령인 김 대통령도 과거 대통령의 나쁜 관습을 따라가는 것이 아닌지 우려됩니다.
▲안 교수=시어머니를 욕하지만 나중에는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닮아가지 않습니까(웃음). 그런데 김 대통령의 통치스타일과 관련,두가지 염려가 있습니다. 첫째 개혁의지는 있는 것 같은데 정책비전이 뚜렷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미래를 투시,조망하는 정책비전이 없으니 노동정책·외교안보정책 등에서 아랫사람들간의 불협화음이 끊이지 않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김 대통령이 갈채와 환호를 좋아하는 인기인이라는 점입니다. 김 대통령이 야당시절 쌓아온 승부사 기질은 개혁에 장점도 되지만 약점도 됩니다. 주위의 비판과 조언에 더 귀를 기울이고 단기승부에 집착하기보다 장기승부를 겨냥하는 정치를 펴야 할 것입니다.
▲사회=이제 왜 이렇게 되었는가를 한번 따져 보지요.
▲김 교수=박·전·노 대통령들은 전부 군출신 아닙니까. 권력기반이나 리더십이 전부 군에 있었습니다. 즉 군을 기반으로 한 힘의 통치였죠. 그래서 통치행위의 수단이나 합리성보다는 성취결과를 더 중요시한 겁니다. 리더십을 놓고 볼때 박 전 대통령은 교조적 기업가형,전 전 대통령은 저돌적 해결사형,노 전 대통령은 소극적 상황수용형으로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지금도 과거와 마찬가지로 국민들이 대통령에 거는 기대는 변함이 없는 것 같습니다. 대통령이 만능해결사나 백과사전식 지도자가 되길 원하는 겁니다. 이는 대통령중심제의 제도와 더불어 한국 특유의 가부장적인 정치문화와도 연관있습니다. 거기에 대통령은 압박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인치라는 불가피한 부작용이 나온 겁니다.
▲이 교수=제도와 구조도 문제겠으나 윗사람만 쳐다보는 국민의식도 문제예요. 집권사의 절대성을 너무 존중하는 것입니다. 또 전통적으로 우리는 비판의식이 희박하다는 얘기를 많이 듣지 않습니까. 관료지배나 유교의 가부장적인 관습,관존민비,일제식민지배의 순화,미국이라는 신형사대주의에 겹쳐 군사문화까지 겪으며 우리는 어느새 획일주의적인 사고를 수용하도록 강요당한 것입니다. 또 우리 국민성이 호·불호를 분명히 가리기보다 싫은 것은 피해가는 경향이 있지 않습니까. 시시비비해서 다치기보다 까다로운 것은 피하고 보자는 생존의식이 강한겁니다.
▲안 교수=거기에는 매스미디어의 책임도 큽니다. 양철냄비같은 국민들의 생각을 여과하고 제자리잡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안으로 아무 것도 안하고 국가경쟁력만 외치면 후유증이 우려됩니다.
어쨌든 지금까지는 한국정치에서 지성이 필요 없었습니다. 여당은 힘을 쓰면 되고 야당은 저항하면 됐으니까요. 정당에는 제대로 정책연구를 하는 기구나 인력이 거의 없었습니다. 또 그간 금권정치의 폐해가 커 돈없는 사람은 실제로 정치에 입문할 엄두도 못냈습니다. 결국 정치는 정치인의 모리세계일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공천자에 더 눈치
▲사회=저도 국회주변을 취재하며 20여년 생활했습니다. 그래서 느낀 것의 첫째는 여당이 쿠데타의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공화당은 5·16의,민정당은 5·17의 결과였고 권력보조수단으로만 기능했습니다.
또 독재권력과 맞서 싸운 여당세력은 양김씨를 구심점으로 철통같은 결속력이 있어야 투쟁이 가능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상도동·동교동식으로 사당화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아직도 야당은 전당대회를 언제하느냐는 결정에 동교동 눈치를 봐야 하고 여당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의 정당이 안고 있는 문제를 지난날의 요인에서 찾아봅시다.
○인기집착 말아야
▲이 교수=전적으로 동감입니다. 서구의 정당은 정책을 갖고 선거에서 대결하는 집단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여당은 독재,야당은 반독재투쟁의 단순한 구도였지요. 서구에서는 정당이름만 들어도 어떤 정책을 갖고 있는지 알 정도입니다. 과거의 유산을 고치려면 대통령이 자기권력을 최소화해야 합니다. 자기를 죽이면서 개혁을 하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안 교수=정당마다 이념과 생각이 분명치 않습니다. 일견해서 캐치 올 파티(catch all party),즉 두루잡기 정당의 모습에 가깝습니다.
15대 때는 정당편제가 색깔있게 물갈이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양당제든 다당제든 이념·정책을 중심으로 보다 역동적인 정치과정을 전개했으면 좋겠습니다.
▲김 교수=지금까지 우리 여당은 국민보다 권력을 더 생각해왔죠. 그러한 도치현상이 우리 정당의 특수성과 운명을 규정했습니다. 정당이 제도화하지 못하고 인물 중심의 정당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야당의 경우도 권위주의하에서 결사의 자유가 봉쇄돼 탁월한 능력을 가진 개인중심으로의 결속이 불가피했습니다. 카리스마를 가진 개인이 무서운 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억압적인 체제에서 살아남은 한 두사람은 엄청난 흡인력과 구심력을 갖습니다. 32년간의 군사정권하에서 야당은 양김씨의 카리스마에 속하고 여당은 독재권력에 추종했습니다. 한 김씨가 은퇴했다고 하지만 섭정한다는 얘기도 나오고 하니까 정치패러다임은 과거와 같은 거지요.
○세대교체 바람직
▲이 교수=대통령이 일을 주어야 정당이 일을 할 것 아닙니까. 근본적으로는 대통령이 정당을 정책수립기관으로 인정하지 않는게 문제입니다. 정당이 정책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게 되면 언론·학계·관계 등에서도 정치인들은 충원될 것입니다. 그런걸 대통령이 선도해야 합니다.
▲김 교수=유럽·미국의 정치인들은 자기 나름의 철학을 갖고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반면 우리 정치인·정당인들은 이기주의·출세지향주의 타성에 젖어있습니다. 정당이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다. 정치권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는 것은 그런 면에서 바람직합니다.
▲사회=의회의 무력증을 개선하고 활성화하는 방안이 시급한 과제인 것 같습니다. 21세기의 생존전략을 위해서는 의회에서 활발한 토론으로 최선의 결론을 이뤄야 합니다.
▲안 교수=의회는 무엇보다 자율성·생산성·도덕성의 요소를 가져야 합니다. 현재는 행정부가 의회에 비해 절대우위에 있습니다. 이제 의회는 정치의 본산이자 대의민주주의의 전당이 돼야 합니다. 의회와 정당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우선 의회가 자율성을 찾아야 하며 이는 결국 대통령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둘째로 의회가 생산성을 갖추고 스스로 격을 높여야 합니다. 정책전문성을 높일 수 있는 제도적 장치와 더불어 인물발굴에도 힘써야 할 것입니다. 셋째 도덕성을 갖춘 국회가 되어야 합니다. 노동위 돈봉투사건,농안법 로비같이 돈사건만 났다하면 의원들이 등장하는 풍토는 안됩니다.
▲김 교수=개혁입법이 채택된 지금 시점에서 정치의 상부구조와 외피는 상당히 바람직한 수준의 변화를 하고 있습니다. 그와 더불어 하부구조도 변화를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지방자치제·정당의 민주화는 물론 정치권 인사 본인들의 정치의식에도 큰 변화가 와야 합니다.
그중에서 정당의 민주화는 시급한 과제입니다. 제도적으로는 의원공천에 있어 상향식 방안이 중요합니다. 선거비용도 법적으로만이 아니고 현실적으로 지켜져야 합니다.
▲이 교수=정치는 예측가능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확실한 것은 4년뒤 대선이 있다는 것 외에는 예측가능한게 없습니다.
여야 2인자는 누구인지 밝혀지고 DJ도 일선에 나오려면 당당히 나와야 합니다.
▲안 교수=지방자치에 대해서도 기대가 큽니다. 지방자치가 성공하면 지역갈등도 많이 완화될 것입니다. 복지부동의 관료제 개혁도 시급합니다. 페레스트로이카의 최대 적이 바로 소련의 관료제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일과 권한을 함께 주어 신명나서 일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게 중요합니다.
○관료들 복지부동
▲김 교수=관료제는 공룡같은 존재입니다. 가장 필요하면서도 역기능적 요소가 강합니다. 호소카와 개혁도 관료제 때문에 실패했습니다. 정부는 지난 1년여동안 개혁을 강조하다 이젠 국가경쟁력을 내걸고 있습니다. 경쟁력 강화라는 것이 개혁의 맥락에서 추진되어야지 개혁의 단절과 이탈을 의미하면 안됩니다.
▲안 교수=개혁과 경제활성화는 두마리 토끼입니다. 양자가 장기적으로는 연계가 되다 단기적으로는 서로 모순을 일으키는게 상례입니다. 기업인들은 개혁에서 손을 떼고 경제활성화로만 가야 된다고 주장하나,그렇게 되면 그간의 개혁정치가 모두 허사가 됩니다. 경제활성화는 권위주의체제 해체의 관점에서 진행되어야 하며 무엇보다 그것을 구실로 사회개혁을 외면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사회=지난 한 세대에 걸쳐 뿌려진 우리 정치의 낙후·왜곡요인들은 여전히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습니다.
21세기 선진화를 지향하는 오늘 그런 문제들을 하나씩 분석·극복해 나가는 것이 개혁 아니겠습니까. 장시간 말씀 감사합니다.<정리=박영수·최훈기자>
□5·16이후 주요 정치적 사건 연표
▲65년 6월 한일 국교정상화 파동
▲69년 9월 3선개헌
▲71년 4월 7대 대선서 박정희 공화당 후보 김대중 신민당 후 보에 승리
▲72년10월 유신선포
▲73년 8월 김대중 납치사건
▲79년10월 부마항쟁과 10·26 발생
▲79년12월 12·12로 신군부 등장
▲80년 5월 5·17로 신군부 정권장악과 5·18 광주민중항쟁 발발
▲85년 2월 2·12총선에서 신한민주당 돌풍
▲86년12월 이민우 신한민주당 총재 내각제 수용 시사(이민우파 동)
▲87년 4월 4·13 호헌조치와 통일민주당 창당방해사건
▲87년 6월 6·10항쟁과 6·29선언
▲87년10월 야권분열(통일민주당과 평민당으로)
▲87년12월 노태우 민정당 대통령후보 당선
▲88년11월 전두환 전 대통령 백담사 「유배」
▲90년 2월 3당통합
▲93년 2월 문민정부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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