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단순히 주는 게 아니에요 얻는 게 더 많은걸요”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7호 02면

“자네, 교복 하나 맡게나.”
성균관대 사회학과 유홍준(49) 교수. 그에게 주례를 부탁하러 간 제자들이 으레 듣는 말이다. 유 교수는 주례를 승낙하는 대가로 제자들에게 가난해서 교복을 못 사입는 학생들에게 교복을 한 벌 맞춰주라고 권한다. 스스로 4년째 가난한 청소년들에게 교복을 기부하고 있다.
유 교수네는 온 가족이 이렇게 작은 나눔에 익숙해 있다. 가족들의 활약상을 보자.
● 부인 정태인(50)씨=성가병원에서 노숙자 돌보기 봉사. 병원 주방시설 지원금 마련해줌. 기회 있을 때마다 병원에서 필요한 물품 기부.
● 큰딸 정은(25)씨=가족에게 봉사의 즐거움을 일깨워줌. 가족 중 처음으로 장애인 보호시설 ‘가브리엘 집’에서 봉사활동 시작.
● 셋째 딸 정원(16)양=네팔서 봉사활동. 최근 자신이 소속된 수서청소년 오케스트라 연주회에 형편이 어려운 공부방 학생들 초대.

온 가족이 기부에 빠진 정이네 집

뭐니뭐니해도 둘째 딸 정이(18·민사고 3)를 따라올 사람이 없다. 정이는 유 교수네 집에서 ‘나눔의 여왕’으로 통한다. 지난해 호남대가 주최한 전국 청소년봉사대회 최우수상을 받았다. 새벽에 일어나 검도를 하는 스포츠 걸. 민사고 여자 농구팀 주장에 민사오케스트라 대표인 팔방미인이다.
유 교수네가 ‘기부 집안’이 되도록 정은씨가 물꼬를 트긴 했지만 정이의 공로가 크다. 정이가 서울사대부중 3학년 때인 2003년. 교복을 입지 않고 등교하는 친구들이 많은 걸 본 정이는 부모님을 졸랐다. 가난한 친구들에게 교복을 맞춰주자고.
“평소에 마음은 있었는데 엄두를 못 내다가 정이 얘길 듣고서 기분 좋게 교복 맞춰주기를 시작했지요.”(유홍준 교수)

정이보다 아버지가 먼저 기부의 마력에 빠지게 됐다. 처음엔 한 해에 5~6명에게 교복을 해주다 이후 7~8명으로 늘렸다. 유 교수의 친구들도 때로 힘을 보탰다.
“후배들과 술을 하다가도 ‘자네도 교복 하나 맡아’라고 말하곤 하지요.”
아버지와 딸들은 ‘시너지 효과’를 냈다.
특히 봉사면 봉사, 기부면 기부, 종목을 가리지 않은 정이의 활약이 눈부셨다.
정이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바쁜 고 3인데도 인도로 해외봉사를 다녀왔고, 틈만 나면 학교 주변 복지시설 ‘천사들의 집’에서 봉사를 하고 있다. 정이가 인도를 다녀와서 만든 민사고 국제봉사활동 동아리 ‘포 앤 프럼 뎀(for & from them)’은 국가청소년위원회가 뽑은 최우수자원봉사팀이 됐다.

동생 정원이도 언니의 영향을 받아 올 6월 국가청소년위원회 국제봉사단원으로 선발돼 네팔의 한 고아원을 방문해 미술 봉사활동을 했다. 큰딸 정은씨의 가브리엘 집 봉사가 가족봉사가 돼서 정이와 정원이가 영향을 받았고 그것이 주변 친구들에게로 확산된 것이다.
이런 활동들은 세 자매에게 소중한 자산으로 돌아왔다. 적은 돈이지만 모이면 큰 도움이 된다는 것, 다른 사람의 기쁨이 곧 자신의 기쁨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체험했다. 사회에 대한 인식이나 포부, 나눔의 가치…. 이런 데서 또래 친구들보다 조금 더 성숙할 수 있었다. 마치 정이가 만든 동아리 이름(for & from them)처럼 이웃을 위했더니 그들에게서 얻은 게 더 많았다.

정이는 국제금융전문가가 되고 싶어한다.
“기업의 사회공헌에 관심이 많아요. 기업이 번 돈이 어떻게 배분돼 또 다른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지 알고 싶은 거죠.”
지난달 16일 정이는 ‘경제, 빈곤, 봉사’를 주제로 한 ‘제1회 청소년 경제회의’를 기획했다. 전국 50여 명의 특목고·국제고 학생들이 모여 정책 대안을 제시하고 영어 토론을 했다.
꿈을 이루기 위해 내년엔 미국으로 유학 갈 예정이다.
“세상을 바꾸고 싶어요. 대학에 가면 아시아 지역의 빈곤을 해결하기 위한 회의나 캠페인, 동아리를 만들래요.”
정이는 콜카타의 빈민지역으로 봉사를 갔을 때 색종이를 처음 본 학생이 대부분이라는 데 충격이 컸다고 한다. 정이는 “일반인도 쉽게 참여할 수 있게 소액기부가 활성화됐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언제 어디서든 최고의 기부는 사랑이다. 조금이라도 사랑을 나눠주면 그것이 기부인데 많은 사람이 기부와 관계없는 것처럼 산다. 선진국에서는 기부가 보편화된 지 오래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나라에선 정이네 가족 같은 얘기가 그리 흔하지는 않다.
정이에게 ‘기부란 ○○이다’란 물음을 주고 ○○를 채워보라고 했다.
이런 답이 나왔다. ‘기부는 모멘텀이다’.
모멘텀은 물리학 용어로서 동력, 추진력 등을 뜻한다.
“소액기부 하나가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오는 건 아니겠죠. 비록 세상을 직접 바꾸진 못하겠지만, 길게 본다면 변화의 계기가 될 수 있을 거예요. 사람의 마음은 당장이라도 움직일 수 있지 않겠어요?”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