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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시대 모두 드라마틱”상상력 폭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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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호 08면

실패한 개혁군주인가, 한국 근대의 씨를 뿌린 계몽군주인가. 조선 22대 왕 정조(재위 1776~1800년)가 한국 대중문화계의 키워드로 각광받고 있다. 조선 후기 르네상스였던 18세기에 대한 흠모이자, 탁월한 통치력을 발휘했던 현군(賢君)에 대한 갈망이다.
17일 첫 전파를 타는 MBC 드라마 ‘이산’(연출 이병훈)은 세손시절부터 의문의 죽음까지 정조의 일대기를 60부작으로 다룬다. 10월 초엔 케이블채널 CGV가 정조의 수원 원행 8일을 숨 가쁘게 그린 ‘정조암살미스터리[8일]’(연출 박종원)을 10부작으로 방영한다. 종영된 KBS-2TV ‘한성별곡 정(正)’(연출 곽정환)에서도 정조는 국운을 되살리려는 외로운 군주로 부각됐다.
지난해엔 정조의 화성 축조와 수원 능행을 중심으로 한 뮤지컬 ‘화성에서 꿈꾸다’(연출 이윤택)가 화제를 모았다. 수원 소재 극본공모전 수상작을 각색한 ‘화성에서…’는 제1회 더뮤지컬어워즈에서 최우수작품상을 받는 등 예술성도 인정받았다.
영화계에서도 ‘영원한 제국’(감독 박종원, 1995) 이후 10여 년 만에 본격적으로 정조시대를 다룬 작품들이 대기 중이다. 김탁환의 백탑파(북학파) 역사소설 『방각본 살인사건』(2003, 황금가지)을 원작으로 한 ‘방각본’이 김태균 감독 체제로 담금질 중이고, 또 다른 백탑파 연작 『열녀문의 비밀』(2005, 황금가지)도 청년필름/바른손에 판권이 팔려 시나리오 각색에 들어갔다. ‘왕의 남자’의 이준익 감독도 정조시대에 활약한 서얼 출신 지식인 그룹 백탑파의 활약상을 그린 영화 ‘백탑파’를 만들겠다고 밝힌 바 있다. 조선 르네상스기로 꼽히는 정조 시대가 바야흐로 21세기 한국 대중문화의 ‘사극 르네상스’를 이끌고 있는 것이다.

쏟아지는 正祖 관련 출판·영상물

대중역사서가 관심 물꼬,소설로 봇물
드라마 ‘정조암살…’는 오세영 소설 『원행』(예담, 2006)을 원작으로 한다. 수원화성 천도 시도를 계기로 개혁파와 수구파의 대결을 부각시키면서 정조의 야망과 통치 리더십을 조명한다. 뮤지컬 ‘화성에서…’도 정조의 화성 능행을 기본 축으로 한다. 조선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역동적이었던 18세기의 정치·사회·문화사를, 그 어느 군주보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정조라는 개인에게 투영해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 같은 흐름은 수년 전부터 일기 시작한 18세기 관련 출판물 붐에 힘입은 바 크다. 영·정조 시대에 대한 학술서야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이를 바탕으로 한 대중교양서가 2000년을 전후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영조와 정조의 나라』(박광용 지음, 푸른역사, 1998), 『정조시대의 사상과 문화』(정옥자 외 지음, 돌베개, 1999) 등 정사(正史)의 재정립부터 『18세기 조선지식인의 발견』(정민 지음, 휴머니스트, 2007), 『조선의 프로페셔널』(안대회 지음, 2007, 휴머니스트) 등 지식인 그룹에 대한 밀도 있는 탐구서까지 다양하다. 덕분에 영·정조 시대에 대한 대중의 이해가 보편화·심층화됐다.
이러한 역사교양서들은 한결같이 18세기를 자생적 근대성의 시발점으로 지목하고 있다. 출판평론가 표정훈씨는 “근대성의 싹을 한국사 안에서 찾아보려는 역사학계의 의지가 영·정조 시대를 조선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르네상스로 복원해냈다”며 “이것이 대중의 민족적 자부심과 맞물려 18세기에 대한 폭발적 관심을 끌어냈다”고 분석했다.
이러한 역사 이해는 18세기를 드라마틱하게 재조명한 역사소설이 붐을 이루면서 한층 강화됐다. 특히 그 전까지 시대적 배경을 제공하는 데 그쳤던 정조가 개인사 측면에서도 재조명됐다.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키워드는 ‘계몽군주’로 대체됐고, 재임 기간 이룬 치적과 의문의 죽음에 따른 개혁의 좌절이 이슈로 떠올랐다.
소설 쪽에서 정조 독살설을 다룬 최초의 작품은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이다. 1993년 출간돼 현재까지 120여만 부가 팔린 베스트셀러다. 작가가 고향(대구)에서 구전으로 전해지던 정조 독살설에 착안해 썼다고 알려진다. 10여 년 만에 이를 다시 본격 제기한 『원행』은 한층 픽션화된 캐릭터 속에 『다빈치 코드』식 추리 플롯을 강화했다.
정조 치하 실학파 지식인 그룹에 대한 관심도 지대하다. 『방각본 살인사건』과 『소설 정약용 살인사건』(김상현 지음, 랜덤하우스중앙, 2006)은 이들의 활약과 고초, 암투를 그린 팩션들이다. 이정명의 『바람의 화원』(밀리언하우스, 2007)은 두 천재화가 김홍도와 신윤복의 맞대결을 그리면서 정조를 핵심 관계인물로 내세운다. 한국형 팩션의 대가 김탁환씨는 이달 중 정조와 박지원을 두 주인공으로 한 『열하광인』을 출간할 예정이다.
출판물의 성과가 쌓여 대중영상물이 제작되는 문화지형을 감안할 때 18세기, 특히 정조 시대는 강점이 있다. 두 차례 전란으로 조선 전기 문화유산이 대부분 소실된 데 비해 규장각 설립 이후 조선 후기의 저작물·유적 등이 비교적 잘 보존돼 왔기 때문이다. 표씨는 “정조 시대에 대한 인문학적 성과가 축적돼 있어 역사적 고증이 비교적 쉬운 편이란 점도 이 시대를 소재로 한 공연·영상물 가공이 활발해지는 요인”이라고 봤다.

연말 대선 맞물려 리더십 재조명
그런데 왜 하필 2007년인가. 창작자들은 정조 시대가 안방극장의 키워드로 뜬 것이 대선 정국과 맞물렸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1997년과 2002년 대선에 앞서 드라마 ‘용의 눈물’ ‘여인천하’가 절정의 인기를 구가했듯, 차기 리더십에 대한 갈망이 자연스레 역사 속 영웅담에 몰입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산’의 이병훈 PD는 “정조는 재위기간 내내 암살 위협에 시달리면서도 조선기의 유례없는 중흥기를 이끈 전례없는 군주”라며 “적대세력을 포용하고 구국안민의 자세로 백성을 이끌었던 리더십은 현재 대선 주자들에게도 시사점이 크다”고 말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정조와 비슷하다’고 했던 유홍준 문화재청장의 발언(2005년)과 관련해선 “오히려 참여정부에 대한 아쉬움과 불만이 정조를 다시 불러내는 것 아니겠느냐”며 거리를 뒀다.
뮤지컬 ‘화성에서…’에 연기감독으로 참여했던 이희성 서울뮤지컬단장도 정조의 리더십을 중요하게 꼽았다. 이 단장은 “공연 당시 대선 주자들이 다 이 뮤지컬을 봤으면 했다”며 “선진 문물을 적극 받아들이고 인재를 고루 등용했던 태도는 대권 주자는 물론 기업 CEO들에게도 귀감이 될 것”이라고 했다.
소설가 김탁환씨는 “역사소설은 현재에 어떤 시사점을 줄 수 있는가가 가장 중요하다”고 전제하면서 “전란이 아닌 평화기엔 이순신이 아니라 정조 같은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격년으로 백탑파 연작을 내놓고 있는 그는 “영조 시대 야인이었던 백탑파가 정조 때 권력층에 올라서면서 추진했던 개혁의 실체와 한계 등은 현재 386 집권세력과 놀라울 정도로 흡사한 구석이 있다”며 “개혁은 어떻게 준비해야 하고 어떻게 하면 실패하게 마련인가를 독자들과 나눠보고 싶어 연작소설을 쓰는 중”이라고 덧붙였다.
정조 시대의 고민이 현재 우리 사회가 처한 고민과 일맥상통한다는 점도 주목거리다. 김씨는 “오늘날 우리가 고민하는 세계화는 200년 전 정조 시대 북경유학파의 고민이기도 했다”며 “이러한 연속성 때문에 정조 시대가 21세기 한국민에게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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