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도 백 년 전엔 한 상 차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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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호 27면

“먹다 보니 어느새 배가 부른데.”
서울 방배동 서래마을에 있는 프렌치 레스토랑 ‘줄라이’(02-534-9544)에서 저녁 식사를 마칠 무렵, 모두 같은 목소리를 낸다. 만족스러운 식사 뒤에 프리 디저트에 이은 메인 디저트, 그리고 몇 가지의 쿠키와 함께 차까지 마시고 나니 그럴 수밖에 없다.
“오래전 프랑스에서 대저택 주인이 손님을 초대할 때 한 가지 고민이 있었대요. 식사 메뉴를 손님들에게 미리 알려줄 것인가 아니면 비밀로 할 것인가였죠.”
“미리 알려주면 식욕을 조절하면서 식사를 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처음부터 마구 먹어대는 바람에 정작 주요 요리가 나오더라도 배가 불러 먹지 못하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미리 알려준다면 손님들의 호기심이나 감탄을 자아낼 만한 순간도 기대할 수 없을 터이고.”
“비밀에 부치는 것이 더 좋을 수도 있겠네요.”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프랑스에서는 지금처럼 순차적으로 요리가 나오지 않았다고 하잖아. 물론 세 번 정도 상을 바꾸면서 내용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한 상 차릴 때마다 한꺼번에 여러 음식이 올라가고 손님들이 원하는 음식을 개인 접시에 덜어 먹었다고 하니 결국 한 상 차림인 셈이었지.”
“그런 식의 상차림은 전시적인 측면이 강했던 거죠. 절대왕정기에 궁정에서 이루어진 엄청난 규모의 연회가 바로 그런 경우였고요. 화려하게 장식되고 탑처럼 쌓아 올린 음식을 식탁 위에 떡 벌어지게 차려놓으면 보기는 좋지만 먹기는 불편했죠. 멀리 있는 음식을 먹으려면 옆사람에게 접시를 건네줄 것을 부탁해야 했고 장식적 효과가 중시되다 보니 음식이 따뜻하게 제공되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죠.”
“게다가 먹고 싶은 음식이나 고기 또는 생선 부위를 남이 먼저 다 먹어버리는 경우도 생겼을 것이고.”
1830년대 초 파리에 주재했던 러시아 대사 쿠라킨 공이 러시아식 상차림을 소개하면서 식사 서비스에 변화가 온다. 정해진 순서에 따라 웨이터가 동일한 음식을 개인별로 제공하였다. 손님들은 이제 더운 음식을 먹을 수 있었고, 다른 사람이 더 좋은 음식을 골라 먹는 것을 시기할 필요가 없어졌다. 고기도 부위별로 분리해서 조리하기 때문에 손님은 원하는 부위를 주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가 정착하기까지는 몇 십 년을 기다려야 했다. 물론 식단도 변했다. 이전에는 고기가 몇 종류씩 여러 번에 걸쳐 나오고 디저트도 열 종류 이상 나오는, 한마디로 대식가용 식단이었다. 이러한 식단도 세기말에 오면 오늘날과 유사한 내용으로 변한다.
“우리의 상차림처럼 ‘공간전개형’이었던 프랑스의 상차림이 ‘시간전개형’ 상차림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 한 세기 정도에 불과한 것이지. 그런데 공간전개형 상차림의 경우에는 미리 음식을 준비해 놓을 수 있고 음식에 장식을 할 시간적 여유도 있지만, 시간전개형 상차림에서는 기본적인 재료를 다듬고 준비해 놓을 수 있지만 거의 모든 음식을 바로 조리해야겠는데.”
그렇다. 주방 설비의 배치뿐만 아니라 작업 방식도 완전히 바뀌게 된다. 특히 계속해서 들어오는 주문을 순차적으로 내고, 코스 요리의 경우 테이블마다 진행순서가 다르니 이를 맞추어 음식을 제대로 내려면 정말 손발이 잘 맞아야 한다. 식당을 나서며 만족스러운 음식을 낸 ‘줄라이’의 주방 모습을 그려본다.

김태경,정한진의 음식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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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것 먹기를 낙으로 삼는 대학 미학과 선후배 김태경(이론과실천 대표)ㆍ정한진(요리사)씨가 미학(美學) 대신 미식(美食)을 탐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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