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켈·사르코지 흔들리는 우정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2면

그래픽 크게보기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우산 밑에서 포옹하는 사진이 10일 전 세계 언론을 통해 보도됐다. 그러나 다정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두 사람의 속내는 차가웠다고 현지 언론은 전했다. 최근 프랑스와 독일의 40여 년 우정이 크게 흔들릴 만한 일들이 잇따라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불가리아 간호사 석방 건이 '불씨'=5월 사르코지 취임 직후 베를린에서 정상회담을 열었을 때만 해도 양국 관계에 대한 전망은 밝았다. 두 사람이 격의 없는 어투로 말하면서 서로를 '친구'라고 호칭한 것이 화제가 됐다.

그러던 두 사람이 불편해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불가리아 간호사 석방 건이었다. 에이즈 환자의 오염된 혈액을 실수로 일반 환자에게 수혈했다는 이유로 8년간 리비아에 붙잡혀 있던 불가리아 간호사들이 석방될 당시 그 공을 사르코지가 독차지한 것이다.

사르코지는 리비아에서 카다피의 환대를 받았고 국제 사회에서도 비인도주의적인 간호사 억류 문제를 해결한 주인공으로 부각됐다. 그러나 이 문제는 독일의 메르켈 총리가 수년간에 걸쳐 불가리아와 리비아는 물론 미국 등과도 개별적으로 접촉하면서 공을 들여 온 일이었다. 그런데 성사 단계에서 사르코지가 불쑥 나타나 주인공이 돼 버린 것이다. 차기 국제통화기금(IMF) 총재의 유럽연합(EU) 후보를 EU 의장인 메르켈과 상의 한마디 없이 사르코지가 발표한 것도 양국 관계를 냉각시켰다. 사르코지는 야당의 중견 정치인 도미니크 스트로스 칸을 IMF 총재 후보로 추천하면서 '열린정치'로 또 한번 박수를 받았다. 그러나 독일 언론은 사르코지가 메르켈을 무시한 것으로 봤다.

메르켈의 한 차례 반격도 있었다. 지난달 초 미국발 서브프라임 사태가 세계 금융시장을 혼란에 빠뜨렸을 당시 사르코지는 메르켈에게 편지를 보냈다. G8(서방 선진 7개국+러시아)이 나서서 해결책을 모색해 보자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G8 의장인 메르켈로부터 "별도의 논의가 필요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차가운 답변이 돌아왔다. 이에 앞서 7월 사르코지가 유럽중앙은행(ECB)이 치솟는 유로화를 잡아야 한다고 했을 때도 메르켈은 "중앙은행의 개입에 반대한다"고 막았다. EU 대부분 국가가 메르켈 의견에 따라가면서 사르코지가 머쓱해졌던 경험이 있다.

잇따른 불협화음은 양국 정상의 강한 캐릭터에서 비롯됐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젊은 50대 리더인 두 사람 모두 국제사회에서 의욕적으로 자국의 목소리를 높이는 데 주력하기 때문이란 것이다. 특히 두 사람 모두 주인공이 되려는 욕심이 강하고 대중적인 인기도 근래에 보기 드물게 높은 편이다. 때문에 당분간 이런 상황은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독일 일간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은 "자크 시라크 전 프랑스 대통령과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가 돈독한 우애를 다지게 된 것 역시 상당 시간이 흐르고 난 뒤"라면서 "양국의 새 지도자들에게도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고 보도했다.

파리=전진배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