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법률 시장 영·미 로펌이 장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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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프랑스 법조계에서는 얼마 전 시라크 정부에서 법무장관을 지낸 파스칼 클레망의 거취가 관심거리로 떠올랐다. 여러 법률회사가 그를 놓고 경합을 벌였다. 그는 결국 미국 로펌인 오릭 해링턴과 계약을 맺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로 우리나라도 내년부터 5년에 걸쳐 미국에 법률시장을 열게 돼 있다. 이달 중순 속개하는 유럽연합(EU)과의 FTA 협상에서도 법률시장 개방은 주요 이슈다. EU 측은 미국 로펌과의 경쟁을 위해서는 미국보다 더 큰 폭으로 조속히 개방할 것을 원하고 있다. 1970년대부터 법률시장을 개방한 프랑스는 현재 영미계 로펌에 시장을 잠식당하고 있다.

◆상위 25개 가운데 프랑스 로펌은 4개뿐=프랑스 변호사들은 대부분 영미계 로펌에서 일하고 싶어한다. 돈 때문이다. 일간 '르 피가로'에 따르면 프랑스 로펌에서 일하는 중견 변호사의 평균 연봉은 45만 유로(약 5억7150만원). 영국계 로펌은 75만 유로(약 9억375만원), 미국 로펌은 100만 유로(약 12억7000만원) 정도를 준다. 미국 로펌은 사건을 많이 물어오는 것에 비례해 인센티브를 주는 제도가 정착돼 있다. 정부 고위직에 재직했던 인사들이 영미 로펌으로 향하는 이유다.

매출 기준으로 프랑스에서 활동 중인 상위 25개 로펌 가운데 프랑스 회사는 4개뿐이다. 미국 회사가 13개, 영국 회사가 5개다. 사르코지 대통령 취임 후 정부기구의 민영화와 대기업의 인수합병 등 큰 '물건'이 많아 영미계 대형 로펌이 군침을 흘리고 있다. 얼마 전 국영 전기 회사인 EDF와 민영 SUEZ 간의 합병 건이 대표적이다. 그 때문에 외국 로펌의 시장 장악은 더욱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외국 로펌의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외국 변호사의 유입도 크게 늘었다. 프랑스 법무부의 '2006 변호사 현황'에 따르면 프랑스에서 활동 중인 외국 변호사는 1425명이다. 2005년에 비해 12%가 늘었다. 올해는 이보다 더 높은 증가세를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외국 로펌과의 제휴도 부담=영미 로펌이 규모와 돈으로 밀어붙이자 프랑스 법률회사는 외국계와의 전략적 제휴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다. 프랑스의 '브르댕 프라트'가 영국의 '슬러터 & 메이'와 손을 잡은 게 최근 사례다. 브르댕 프라트는 제휴 이후 국내 1위로 도약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제휴의 범위에 따라 '정체성' 논란이 제기된다. 영미 로펌은 프랑스 로펌을 흡수하는 방식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프랑스.독일 합작 로펌인 'GGV' 소속 안 리나르 변호사는 "영미계 로펌은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프랑스 로펌과 손을 잡기를 원하지만 흡수통합을 원하기 때문에 계약이 깨지는 예가 많다"고 밝혔다. 그는 "제휴 대상도 프랑스의 대형 로펌에 국한되기 때문에 20명 이하의 소형 로펌이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진다"고 덧붙였다.

지난해 현재 파리시에 등록된 변호사 1만8000여 명 가운데 중.대형 로펌에서 일하는 변호사는 5000명 선이다. 나머지 3분의 2는 경영난을 겪고 있는 상황이다. 1994~97년 개방한 독일의 법률시장은 모두 외국계 손으로 넘어갔다.

파리=전진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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