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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예멘/4년만에 통일깨진 아랍최빈국 상반된 체제 한반도와 유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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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남과 북 왜 싸우나/북 자본주의 남 사회주의에 젖어/신뢰구축없는 통일이 부른 비극
예멘 내전은 불안전한 통일에서 빚어진 것이다. 2차대전이후 유일하게 평화적인 합의에 의한 통일된 예멘 모델이 실패함으로써 한반도의 통일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무엇보다 양측의 체제와 문화차이다. 남북예멘의 분리는 영국이 이 땅에 진출한 183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평화통일은 실로 1백50년만에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동안 북부는 부족중심적으로 이슬람문화에 젖어있었다. 이에 반해 남부는 사회주의체제속에 전통문화는 파괴된채 살아왔다. 그런데도 이들은 아무런 신뢰구축 과정도 없이 동상이몽속에 통일했다가 또다시 총을 서로 겨누는 냉엄한 현실로 돌아온 것이다.
81년 11월 살레 대통령의 남예멘 방문을 시작으로 통일노력이 시작됐다. 이어 구 소련이 페레스트로이카정책으로 제3세계 지원을 중단하는 정세변화에 따라 원조가 끊긴 남예멘은 북예멘과의 관계를 전통회복의 기초위에 급속히 개선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통일논의가 무르익어 90년 5월 통일을 선포했던 것이다.
그러나 양측은 내부의 차이를 무시한채 외형상의 통일만 서두르다 오늘의 내전 불씨를 남기게 된 셈이다. 91년 국민투표를 통해 3대 1이라는 인구비율을 무시한채 총선이 치러졌고 북예멘 출신의 살레 대통령이 이끄는 총국민의회당(GPC)이 1백21석을 얻은데 반해 남부출신 베이드 부통령의 예멘사회당(YSP)은 56석을 차지하는데 그쳤다. 이러한 권력불균형속에 살레 대통령의 독주는 아직 무장력을 갖고 있는 남부측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무력충돌로 발전한 직접적 원인은 역시 군대통합의 실패다.
남북예멘은 과거 대립관계 때문에 나라규모에 비해 거대한 군사력을 갖고 있다. 북측과 남측이 각각 정규군을 38만명과 27만명,예비군 10만명과 4만명을 갖고 있다. 게다가 이들은 각각 자기 지도자에게만 충성하는 사병성격을 벗어나지 못했다.
여기에 연 1백%를 넘는 인플레,30%를 넘는 실업률과 같은 통일이후의 경제악화도 불안요인으로 작용했다. 통일만 하면 북예멘의 경제력이 남예멘까지 풍족하게 만들 것이라는 기대가 무산되자 『통일을 가장해 점령하려 한다』는 반발로 터져 나오게 된 것이다.
90년 5월22일 통일예멘 수립을 선언했으나 준비없는 통일은 갈등의 길을 내달았다.
북부 지도자 알리 압둘라 살레가 대통령,남부 지도자 알리 살렘 알 베이드가 부통령으로 각각 취임하고,91년 5월에는 국민투표로 통일헌법을 채택했다. 그러나 지도부내 갈등으로 92년 11월 실시될 예정이었던 총선을 93년 4월로 연기하면서 불화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더구나 총선결과는 합법적 정부출범의 기초가 되지못한채 남북의 세력불균형만 노출시켰다.
북부가 1백83석을,남부가 56석을 획득한 것은 북예멘 인구가 남예멘 인구의 3배가 넘는 9백만명이어서 예고됐던 결과였다.
베이드 부통령은 사사건건 대립하며 3당 연립정부의 각종 회의에 참석을 거부했다. 베이드 부통령은 살레 대통령이 권력을 너무 독점하고 오랫동안 가난에 찌든 남예멘의 발전을 도외시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또 자신의 가족과 지지자들이 살해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8월에는 수도 사나를 떠나 자신의 거점이자 구 남예멘 수도인 아덴으로 돌아가버렸다. 그 사이 베이드의 조카가 살해됐다.
후세인 요르단 국왕·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의장 등의 중재로 양측은 마지못해 지난 2월20일 암만에서 「위기종식을 위한 화해협정」에 서명했다. 살레 대통령이 베이드 부통령의 일부 개혁요구를 수용한 것이다.
그러나 몇시간뒤 탱크까지 동원해 또다시 무력충돌,다가올 내전을 예고했다.
현재 남예멘은 휴전을 요구하고 있지만 북예멘측은 남예멘을 완전히 점령할 때까지 전쟁을 계속하겠다고 선언했다. 남예멘의 휴전 역시 통일보다는 분리·독립을 전제로 한 것이다. 결국 예멘은 물리력을 우위로 한 점령이 아니면 새로운 분단시대를 거치지 않을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김진국기자>
◎예멘 어떤 나라인가/모카커피로 유명… 군은 남과 북이 따로 운영
통일의 기쁨을 맛보았던 4년전만 하더라도 예멘은 「아라비아 펠릭스」(행복한 아라비아)의 옛 명성을 되찾는듯 했다.
그러나 이제 남·북 예멘간의 내전발발로 동족상잔의 나락으로 굴러떨어졌다.
아라비아 남부에 위치한 예멘은 92년 현재 총인구가 1천2백60만명으로 그중 2백40만명이 남예멘에 속해있다. 영토면적은 프랑스와 비슷한 53만6천8백69평방㎞이다.
예멘은 국명보다는 「모카」라는 커피명으로 더 친숙하다. 세계의 커피 애호가들로부터 애용되고 있는 모카커피는 바로 북예멘 모카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다.
예멘은 시바왕국(기원전 950∼115년) 시대에 찬란한 문화를 피운 적도 있으며 최근에는 남·북 예멘을 자력으로 통일시켰다는 점을 내세우며 가난하지만 자존심 많은 민족으로 통했다.
예멘이 분단의 재앙이 뿌려진 것은 1839년 동서무역의 중계항으로서 번성한 아덴이 영국에 할양되면서부터.
영국지배하의 남예멘,오스만 터키 지배하의 북예멘으로 외세에 의한 경계가 그어지기 시작했다.
그후 북예메은 1918년에,남예멘은 1967년에 각각 터키와 영국의 지배에서 독립해 북예멘은 자본주의체제를,남예멘은 사회주의체제를 유지하면서 대립해왔다.
그러나 동서 화해무드는 남·북 예멘의 벽을 트고 90년 5월22일 염원하던 통일을 달성시켰다.
예멘은 통일협정에서 사나를 행정수도로,아덴을 경제수도로 정했으며 남북군은 독자적으로 운영돼왔다.
석유 등 지하자원을 보유한 예멘은 통일로 인해 비약적인 경제성장이 예상됐으나 아직도 아랍의 최빈국을 면치 못하고 있다.<김국진기자>
◎한국과 경제교류 현황/현대·선경등 6개기업 진출… 주로 원유거래/작년 1억5천만불 교역… 한동안 침체될듯
우리나라와 예멘의 지난해 교역규모는 1억5천2백만달러로 그리 크지는 않다.
이 가운데 수입은 1억3백13만달러,수출은 4천8백80만달러다.
주요 수입품목으로는 원유가 전체수입의 86.2%를 차지하고 있다. 또 우리의 수출품목은 타이어·직물·벽지 등 주로 소비재가 많다. 그러나 예멘과 거래하고 있는 우리나라 기업은 (주)대우·삼성물산 등 모두 84개나 된다.
또 예멘에 직접 진출해있는 우리 기업은 (주)선경·유공·한국석유개발공사·현대종합상사·삼환기업·현대건설 등 모두 6개다.
이 가운데 한국석유개발공사·현대종합상사·유공·삼환기업은 투자진출을 통해 현지법인을 운영하고 있고,(주)선경은 지사를 두고 있으며 현대건설은 현지 건설공사에 참여중이다. 반면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는 예멘기업은 하나도 없다.
예멘은 석유매장량이 적고 별다른 산업기반이 없어 중동국가 가운데 최빈국으로 꼽히고 있다. 이 때문에 예멘은 주로 인접국가들의 원조에 많이 기대왔다. 또 상인들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장사해 외화를 벌고 있다.
그러나 지난 90년 걸프전때 이라크편을 들어주는 바람에 전후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로부터 원조가 뚝 끊겼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는 50만명의 예멘인들을 한꺼번에 추방하기도 했다.
이때부터 예멘은 외환사정이 극도로 악화되는 등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어왔다. 의욕적으로 추진하던 천연가스 및 원유개발사업이 지지부진한 것은 물론 지난해에는 공무원의 월급도 제때 지급해주지 못할 정도였다.
우리나라 기업들은 그동안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에서 흘러들어온 오일달러를 따내기 위해 예멘에 진출했으나 걸프전 이후에는 큰 재미를 보지 못했다. 지난 91년 예멘의 국내총생산(GDP)은 81억달러,1인당 GDP는 7백17달러로 각각 추정된다고 무공측은 밝혔다.
무공 관계자는 『걸프전이후 예멘의 경제력이 급속히 약해진데다 전쟁까지 일어나는 바람에 한동안 경제교류는 극히 제한될 전망』이라고 밝혔다.<남윤호기자>
□예멘 정치위기 일지
▲1962=이만 아메드 국왕 축출,사우디아라비아가 지원하는 왕당 파와 이집트가 지원하는 공화파 반란군간에 내전발생.
▲64=이집트가 지원하는 반란군 영국식민지 아덴(후에 남예멘)을 근거지로 대영식민지 투쟁전개.
▲67=남예멘 독립,영국군 철수.
▲70=남예멘 공산주의자 인접국 오만 전복위해 전투개시,영국·오 만·이란 합동군에 6년 전투에서 패배.
▲72.9∼11=남·북예멘 전투.
▲79.2=북예멘 아메드 가시미대통령 피살,남북예멘 전투발발.
▲86.1=남예멘의 알리 나세르 모하메드 대통령측과 공산주의 반 란군 사이에 내전발생.
▲90.5.22=남·북예멘 통일.
▲93.4.27=예멘 최초의 다당제 총선.
▲93.7=바이드 부통령 18개항의 개혁안 요구하며 집무거부.
▲94.2.20=살레·바이드 등 예멘 지도자들 암만에서 위기종식 위한 화해협정에 서명.
▲3.1=예멘·오만·요르단 관리들과 미·불 외교관들로 구성된 중 재위원회 남·북 군간의 화해노력 시작.
▲4.27∼30=사나 북부 암란에서 2백여대의 탱크가 동원된 통 일이후 최악의 남·북간 전투발생,군인 4백여명 사망 또는 부상 .
▲4.28=하산 마키 부총리 총상,경호원 3명 사망,범인 5명 체포.
▲4.30=북군 퇴각중인 남측 기갑여단 공격,남측 선전포고와 다 름없다고 주장.
▲5.1=전투중단.살레 예멘의 통일을 위해 투쟁하겠다고 다짐.
▲5.4=북부 다마르시에서 로켓과 대포·탱크를 동원한 전투 발생 .
▲5.5=남·북측 군용기들 사나와 아덴공항을 서로 폭격,살레 대 통령 비상사태 선포.<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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