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로맨스'는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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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양균-신정아 이메일 연서 파문'을 보면 '내 메일도 누가 들춰보면 어쩌나' 하는 우려가 든다. 더 나아가 '디지털 시대에 과연 프라이버시가 존재할 수 있을지' 하는 의구심에 겁이 날 정도다.

'문제'가 발생하면 공권력이 동원돼 휴대폰 통화내역, PC속의 데이터, 이메일 내용, 은행거래 내역, CCTV(폐쇄회로) 화면을 뒤지는 일이 일상화 됐다. 비단 공권력이 아니라도 누구나 어느 정도의 전문지식을 갖고 내 사생활을 들추려 마음만 먹는다면 '디지털 벌거숭이'가 되는 것은 순식간이다.

'디지털'로 통용되는 현대사회에서 개인들에게 '프라이버시'가 존재하기나 하는걸까? 이 물음에 전문가들은 "원시인처럼 살지 않는 한 디지털 시대에서 프라이버시란 없다"고 입을 모은다.

현대인들은 편리한 각종 기술의 혜택을 모두 포기하고 프라이버시를 지키거나 아니면 프라이버시를 포기하고 편리한 삶을 살거나. 이 둘 중의 하나를 요구받고 있는 것이다.

◇휴대폰-이메일, 나를 드러내는 '창'

몇해 전 한 정치인은 도청 위험 때문에 4대의 휴대폰을 번갈아 사용한다고 국회에서 공개적으로 말한 바 있다. 이 4대의 휴대폰은 모두 본인 명의로 가입하지 않았다. 이 정치인은 번갈아 사용하는 순서도 매번 달리한다고 한다.

휴대폰은 현대인들에게는 생활 필수품이지만 누군가 나를 들여다보려고 마음먹는다면 제일 먼저 뒤져보게 되는 대상이다. 통화한 내용까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누구와 언제 얼마동안 통화했는지 여부가 고스란히 통신사의 서버에 기록돼 있다.

이 때문에 프라이버시를 지키고 싶다면 휴대폰은 조심해야 할 물건 1호. 우선 본인 이름으로 가입하지 않는 것이 혹시 모를 '추적'을 피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본인 이름으로 가입하지 않은 휴대폰은 불편하기 짝이없다.

문자메시지(SMS) 역시 내용은 확인되지 않지만 누구와 언제 메시지를 주고받았는지 기록이 남는다. 대신 메시지 내용은 휴대폰 안에 저장된다. 때문에 매일 매일 휴대폰 메시지 함을 지워두는 센스(?)도 프라이버시를 지키기 위해서는 필수다. 문자메시지는 휴대폰에서 삭제하면 이메일처럼 기록이 남지는 않는다. 휴대폰 저장공간이 적어 원본데이터를 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메일은 사실상 쥐약(?)이다. 컴퓨터로 받아 보기만 하면 일반인이 스스로 데이터를 완전히 삭제하는 일이 거의 불가능하다. '변양균-신정아 연서' 사건이 이를 잘 말해준다.

이 때문에 프라이버시를 지켜야 할 일이 있다면 이메일은 가급적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 꼭 써야 한다면 회사 이메일 대신 대형 포털회사에서 제공하는 웹메일을 사용한다. 회사 이메일은 사장님도 검열할 수 있다.

최근에는 프라이버시를 보호하기 위해 외국계 포털 업체의 이메일을 사용한다는 사람도 늘고 있다. 공권력이 인터넷 회사의 서버를 뒤질 경우에 대비해서다. 그러나 PC로 받아 읽어본 이메일의 내용은 PC에 여전히 남아 있으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CCTV-교통카드-신용카드, 생활범위를 그려낸다

현관문을 나서는 순간 수많은 눈들이 나의 움직임을 주시한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와 빌딩 로비, 은행, 길가의 공원등 공공장소에 설치된 CCTV는 24시간 나를 감시하고 있다.

최근 CCTV 설치가 늘어나면서 이를 피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게 됐다. 한적한 전원마을에 단독주택을 짓고 작은 도로로 걸어다니고 은행이나 호텔 같은 대형 건물을 전혀 찾지 않는다면 모를까.

특히 CCTV는 관리자가 누구이고 녹화된 화면의 기록을 얼마동안 어떻게 보관하는지, 누가 이 화면을 볼 수 있는지에 대한 관리 규정이 갖춰져 있지 않아 개인 사생활 정보 유출의 사각지대로 지적되고 있다.

교통카드를 쓰는 것은 내가 움직인 반경을 지도로 그려주는 것과 다름없다. 언제 어디서 몇번 버스를 타고 어디서 지하철을 갈아탔으며 어디에서 내렸는지 일목요연하게 그림이 그려진다.

서울시는 교통카드 체제 전격 도입 이후 서울시민들의 주요 대중교통 이용패턴을 데이터로 분석해 보관하고 있다. 범죄수사등에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이 데이터를 공개하기도 한다. 지난 2004년 검거된 연쇄살해범 유영철은 교통카드 사용기록 때문에 추가 살해사건이 드러나기도 했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교통카드의 편리함과 할인혜택을 이용하면서 내 생활정보를 고스란히 넘겨주거나 매번 번거롭고 비싸지만 현금으로 돈을 내고 프라이버시를 지키거나, 선택은 사용자 몫이다.

만일 교통카드 기능이 포함된 신용카드를 쓴다면 내 생활수준과 좋아하는 음식까지 모두 공개하는 격이 된다. 몇시에 퇴근해 어느 지역에서 내려 얼마정도의 저녁식사비를 지급했는지 단번에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원시인으로 살거나, 프라이버시 없이 살거나

생활에서 드러나는 대표적인 몇 사례만 봤는데도 사실상 '프라이버시'를 지키면서 편리한 현대의 문명을 이용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이런 일은 점점 더 정도가 심해질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도 은행계좌를 이용하는 것은 공권력이 원할 때 내 돈의 흐름을 알려줘도 좋다는 동의서를 내는 것과 다름없다. 뭔가 투명하지 않은 돈거래가 있는 사람들이 은행보다는 금고에 보관한 현금을 사용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개인의 내밀한 프라이버시로 분류되는 병력기록도 불안하긴 마찬가지다. 최근에는 병원들이 대부분 디지털화되고 있어 언제 무슨 병을 앓았는지, 어떻게 치료를 받았는지 고스란히 디지털 정보로 보관된다.

은행이나 병원들이 첨단 보안 솔루션을 사용해 기록을 관리하고 있기는 하지만 보안에 '100% 신뢰'란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여전히 내 은밀한 정보가 샐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결국 현대인들은 문명의 편리함을 이용하기 위해서 '프라이버시'를 포기하는 대가를 지불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이 때문에 각종 기관이나 기업이 보관하고 있는 개인의 디지털 정보를 철저히 관리하고 정보 수집 목적 외에 다른 용도로 사용할 때 개인의 동의를 받도록 하는 한편 공권력이 개인의 정보를 들춰보기 위해 필요한 절차를 투명하게 명시하는 등 제도를 꼼꼼히 손질하고 점검하는 것이 프라이버시를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대안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머니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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