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정동영과 아버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7면

군화발이 그의 옆구리를 찼다. 엎어지며 시계가 풀렸다. 그는 시계부터 주우려 했다. 아버지가 물려준 시계였기 때문이다. 그 속엔 아버지의 체온이 담겨 있었다. 그는 손을 뻗었다. 그러나 시계는 점점 멀어져 갔다. 전경들 손에 그는 끌려갔다. 멀어져 가는 시계를 보고 그는 '아버지'를 목놓아 불렀다.

정동영. 열린우리당 당의장이다. 그에게 유신독재는 또 다르게 자리매김됐다. 아버지와 두 번째 이별을 강요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5년 뒤인 1978년. 유신독재 종식 1년 전이다. 그는 MBC 기자 시험에 응시했다. 유신은 또다시 그 앞에 다가와 선택을 강요했다. 면접시험에서 사장이 물었다.

"현 시국을 어떻게 보는지 말하시오." 그는 잠시 머뭇거렸다. 소신과 현실 사이의 고민이었다. 그는 대답했다. "유신은 망하고 말겁니다." 떨어질 것을 각오했다. 그러나 합격했다.

그는 전북 순창 구림에서 태어났다.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이 기승을 부리던 곳이다. 남부군 사령부가 위치했었다. 낮은 대한민국, 밤은 인민공화국이던 곳이다. 정동영의 아버지 정진철은 그 곳 면장이었다. 그 와중에 그는 네 아들 모두를 잃었다. "마을을 구하기 위해 아들 넷을 내주신 겁니다." 정동영의 설명이다. 더 이상의 얘기는 없다.

전쟁이 끝나고 휴전협정이 맺어지던 그날. 정진철은 다섯 번째 아들을 얻었다. 그 아이가 정동영이다. 정동영은 열살 때 전주로 유학을 갔다. 친척 집에서 학교를 다녔다. 중학교 다닐 때였다. 아버지는 정동영을 찾아왔다. 그리고는 말없이 동영만 바라보다 돌아갔다. 정동영은 아직도 그 장면을 잊을 수 없다 했다.

돌이켜 보면 아버지가 정치복귀를 시도하다 좌절한 때였던 것 같다고 했다. 그의 아버지 정진철은 전쟁 후 정치에 입문했다. 3년 뒤 도의회에도 진출했다. 그러나 중앙무대 진입엔 실패했다. 간경화를 앓다 49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정동영이 17세 되던 해다. 아버지의 시계는 그때 물려받았다.

"저는 늘 절망 속에서 살아왔어요. 그러면서 악의 구조를 체험했지요. 언제나 내 앞에 있는 거대한 벽을 느꼈어요."

기자를 할 때도, 정치를 할 때도 그랬다는 것이다. 때문에 정동영에게는 한(恨)의 응어리가 있다. 그 때문인지 그는 혼자인 것이 더 익숙하다고 했다. 그것이 그의 밑천일 지 모른다. 지금 정동영은 새로운 벽을 찾았다고 했다.

"구(舊)정치입니다. 생각할수록 전의(戰意)가 살아납니다." 부수고 말겠다고 했다. 물론 좋은 얘기다. 그 같은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나 문제는 어떻게 부수느냐다. 말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요즘 민생 현장을 다닌다. 남대문 시장을 찾았다. 택시기사들과 해장국도 먹었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약속했다. 남대문에선 10만원권 발행을, 택시기사에겐 연료값 인상에 따른 소득 보전을 말이다. 그러나 '하겠다'는 말만 있지 '어떻게 하겠다'가 없다. '혼자'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앵커식 정치'를 한다는 지적도 받는 것은 아닐까.

오늘의 그는 '하겠다'는 의지로 이룩됐을 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그에겐 '어떻게'가 더 중요하다. 구 정치는 '하겠다'는 말로 무너지진 않는다. 유신정권도 구 정치의 타파를 명분으로 내걸었다. 그러나 '어떻게'에서 실패했다. 전두환 정권도 마찬가지였다. 구 정치로 구 정치를 무너뜨릴 수 없었다. 새 정치는 '어떻게'의 문제다. 시간을 갖고 생각하기 바란다. 아버지가 시계를 준 이유도 그 때문은 아닐는지 모르겠다.

이연홍 정치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