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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그플레이션’ 시대 오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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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호 21면

애그플레이션(Agflation). 농산물 가격(Agricultural Prices)과 인플레이션(Inflation)의 합성어다. 농산물값 상승이 야기하는 인플레이션을 뜻한다. 세계 각국에서 농산물 가격이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면서 새로 만들어진 용어다. 1970년대 중반 스태그플레이션(경기침체+고물가)이란 용어가 처음 나왔을 때처럼 아직 대중화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최근 농산물값 흐름을 보면 머지않아 애그플레이션이란 용어가 일상화할 가능성이 엿보인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최근 “애그플레이션 우려가 커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유럽·중국·인도 등의 8월 말 식품 가격이 올해 초보다 10% 이상 올랐기 때문이다. 특히 식품값은 지난 5월 이후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밀·쌀·옥수수·돼지고기 등 전방위 상승

최근 가장 불안한 것이 밀 가격이다. 지난주 미국 시카고상품거래소(CBOT)에서 9월 말 인도분 밀 선물값이 1부셀(35.2ℓ)당 8달러 선을 돌파, 지난 6월 초 이후 3개월 새 50% 이상 뛰었다(아래 그래프 참조). 공급 부족이 문제다. 이상 가뭄과 서리 때문에 세계 2, 3위 밀 수출국인 캐나다와 호주의 생산량이 지난해보다 20% 정도 줄었다.
국제곡물위원회(IGC)는 올해 밀 생산량을 6억700만t으로 예상했다. 반면 수요는 6억1400만t에 달할 전망이다. 700만t이 부족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결국 각국이 비축하고 있는 재고 물량으로 벌충하는 수밖에 없다.

사정이 이쯤 되자 밀의 무기화 조짐도 일고 있다. 최근 러시아가 곡물 파동을 대비해 밀 수출 금지를 검토하고 있다고 파이낸셜 타임스(FT)가 지난주 보도했다. 러시아는 세계 4위 밀 수출국이다. 수출금지가 현실화되면 세계 밀 시장이 요동칠 수도 있다.

밀값 상승은 이미 강세를 보이고 있는 옥수수·쌀·보리·콩 등의 가격을 다시 자극할 공산이 크다. 이들 작물값은 지난 2005년 이후 평균 30% 이상 올랐다. 특히 에탄올의 원료인 옥수수값은 고유가 시대를 맞아 고공 비행하고 있다.

이 밖에 중국에서는 돼지고기 파동이 일어났다. 중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육류인 돼지고기값은 지난해 50% 급등한 데 이어 올 상반기에 20% 추가 상승했다. 사료값 급등·돌림병 등이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미 곡물시장 컨설팅업체인 돈자문그룹(DAA)의 전망을 보면 내년 세계 곡물시장 사정도 빠듯할 것으로 보인다. 내년 세계 곡물 생산량은 1조6600만t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최근 소득이 빠르게 늘고 있는 중국·인도의 곡물 소비가 급증하는 바람에 수요는 1조6800만t에 이를 전망이다. 이에 따라 내년 곡물 재고는 3억t으로 사상 최저 수준에 이를 전망이다.

게다가 곡물시장 긴장이 고조되면서 핫머니까지 몰리고 있다. DAA의 애널리스트인 마틴 포먼은 “원유가격이 단기적으로 급등할 가능성이 줄어들자 헤지펀드들이 밀 선물을 대거 사들이고 있다”며 “이들은 가격 상승을 기대한 투기거래를 주로 벌이고 있다”고 말했다.

또 미 복합금융그룹인 JP모건 등이 프라이빗 뱅킹 서비스를 활용해 부호들의 자금을 곡물시장으로 돌리고 있기도 하다. 부호들은 ‘제2의 힐러리 클린턴’을 꿈꾸고 있다. 힐러리는 변호사로 활동하던 1978년 31세의 나이로 콩·돼지·소 등 농산물의 선
물에 1000달러를 베팅해 10만 달러를 벌어들인 바 있다.

이렇게 몰리는 투기자금은 가수요를 일으켜 곡물가격의 불안은 부채질할 가능성이 크다. 지난해 상반기 유가가 급등할 때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었다.

■애그플레이션 현실화하나

세계 농산물 가격은 지난 1980년대 중반 이후 안정적인 흐름을 보여왔다. 때로 수요가 공급을 초과한 적이 있기는 했지만 재고가 지금처럼 급격히 줄어드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낮은 농산물값은 저임금 노동력의 꾸준한 유입, 노동생산성 향상과 함께 저인플레이션 시대의 한 축이었다.

농산물 투자자문사인 미 캐피털&크라이시스의 대표인 크리스 메이어는 “농산물 가격이 올 연말 이후 2~3년 이내에 50% 정도 더 오를 가능성도 있다”고 전망했다.

최근 농산물 가격이 가파르게 오르면서 미국·유럽·중국 등의 중앙은행의 부담이 커지고 있다. 서브프라임 사태(미국·유럽)와 경기과열(중국) 등을 치유해야 하는 마당에 애그플레이션이라는 또 다른 골칫거리와 씨름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가 상승분 가운데 농산물값이 차지하는 비중은 선진국의 경우 12~14% 수준이다. 하지만 중국과 인도는 각각 33%와 46%나 된다.

중국·인도의 물가가 농산물 가격에 민감하다는 사실은 또 다른 우려를 낳는다. 그동안 글로벌 시장에 저가 제품을 공급해온 두 나라에서 농산물값 급등으로 물가가 상승하면 세계 시장으로 곧바로 번질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 7월 중국 물가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5.6% 급등했다. 직전까지는 2~3% 수준이었다.
반론도 만만치 않다.

로이터 통신은 최근 농산물값 상승이 장기 추세가 아닐 수도 있다고 전했다. 아르헨티나 등 남미지역 농산물 작황이 좋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농산물값이 오르면서 그동안 묵혀뒀던 남미지역 휴경지가 경작지로 대거 전환되고 있다. 남미지역은 2001년 아르헨티나의 채무불이행 사태 여파로 역내 경기가 침체해 농산물 수요가 줄어 많은 땅이 휴경지로 바뀌었다.

일부 전문가들은 1980년대 이후 나타나지 않았던 ‘콘-호그주기’가 재연될 가능성까지 점치고 있다. 이는 농산물값이 급등하면 경작이 급격히 늘어나 결국 가격이 급락하고, 다시 경작 급감으로 이어져 가격이 가파르게 상승하는 농산물 시장의 대표적인 악순환이다.

이코노미스트지는 “남미지역 밀 작황이 최종 확인되는 내년 1~2월이 글로벌 농산물 시장의 분수령이 될 것”이라며 “그 결과에 따라 애그플레이션 시대가 실제 올지 여부가 판가름날 것”이라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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