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끝나지 않은 ‘화려한 휴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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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호 15면

영화 ‘화려한 휴가’의 예고편을 보고 아이들은 “저거 재미있겠다”라고 했다나. ‘재미라니. 이건 재미라고 이야기할 성질의 것이 아니야.’ 속으로 그들의 경박함을 비난하던 스스로에게 다시 물었다. ‘그럼 너는 뭐가 다른데?’ 하긴, 당시에 복잡한 일이 광주에서 생겨 ‘미스코리아’ 대회를 중계 안 해준다고 섭섭해하던 어린애였고, 이후에도 정치적 무뇌아로 살아온 주제에. 영화를 보고 한번 실컷 우는 걸로 역사에 대한 죄의식을 덜어보려는 내 가벼운 속셈이 ‘재미’로 영화를 보겠다는 아이들보다 나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이윤정의 TV 뒤집기

그렇게 겸손한 마음으로 보긴 했어도 확실히 영화는 아쉬움이 많았다. 자꾸 보면서 아이들이 저곳이 서울인지 광주인지, 누가 시켜 총을 쏘고 죽어나가는 것인지, 평범한 시민들이 왜 총까지 들게 됐는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을까 걱정됐다. 젊은 사람들이 그저 사람들이 많이 죽고 서로 총을 겨누는 액션영화 같은 이 영화 한 편으로 ‘광주’의 참뜻을 되새겨 볼까 하는 노파심도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보고 난 뒤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어쨌든 이야기해줘서. 젊은 세대에게 그나마 ‘재미있겠다’ 싶은 마음이 들어 보게 만들어줘서. 27년 동안 에둘러 말하기만 했던 광주를 내놓고 말하는 상업영화의 문을 열어줘서.

픽션인 영화 한 편이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만, 세상을 보는 눈을 뜨게 하고 진실에 대한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4일 ‘PD 수첩’은 픽션 ‘화려한 휴가’의 충실한 논픽션 부록이었고, 이런 노력들이 ‘5·18인지 8·15’인지 헛갈리는 젊은 세대들에게 생각할 거리 하나를 던져준 것만으로 현실에 자극을 주는 긍정적인 역할로 보인다.
힘든 문을 영화가 열어젖혔으니 이제는 TV 드라마들도 ‘광주’를 본격적으로 말해줬으면 싶다. 그동안 각종 다큐멘터리에서 광주항쟁을 다뤄왔지만 논픽션이 주는 이성에 대한 호소와 드라마가 일으킬 수 있는 감동은 또 다르지 않은가.

‘모래시계’나 ‘제5공화국’에서처럼 드라마에서 광주가 다뤄지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그 세대가 지나왔던 하나의 사건으로서, 혹은 전두환이라는 인물이 지나왔던 몇몇 순간으로서 조명이 맞춰진 것이었다. 어느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하게 전개됐던 광주항쟁을 오롯이 다룬 16부작 미니시리즈 정도라면 어쨌든 아쉬움 없이 그때를 재현할 수 있지 않을까. ‘PD수첩’에서 보인 것처럼 그곳에서 죽어간 사람들 하나하나가 담고 있는 그 가슴 아픈 사연들을 아름답게 승화시키는 드라마라면 큰 목소리로 말하지 않아도 아이들에게 그 시대의 역사를 가르쳐줄 수 있지 않을까.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비장함을 담고 있는 다큐멘터리가 제기한 역사적 진실에 대한 보고가 지난 27년 동안 광주를 바라보는 시선이었다면, ‘이제 함께 마음을 열고 이야기를 나눠보자’며 손을 건네는 드라마가 필요한 때다.

대조영과 주몽, 광개토대왕과 정조, 그리고 내시까지 우리의 역사를 다룬 드라마들을 보면서 그 시대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는 아이들을 생각하면, ‘광주 드라마’에 대한 욕구가 더 커진다. 그저 판타지와 영웅들의 역사만을 즐기기에는 아직 훨씬 더 많이 이야기되어야 할 아픈 현대사가 우리 가까이에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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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정씨는 일간지 문화부 기자를 거쳐 영화 제작자로 활약한 문화통으로 문화를 꼭꼭 씹어 쉬운 글로 풀어내는 재주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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