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의 목소리 다시 하늘로 … 루치아노 파바로티 타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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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10년 전인 1997년 9월 7일, 파바로티는 러시아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서 단독 공연을 가졌다. 관객들의 열띤 호응에 그는 호쾌한 미소로 답례하고 있다.(사진 맨 위) 2003년 12월 그는 새 아내인 니콜레타 만토바니, 당시 11개월된 딸 앨리스와 함께 공식석상에 모습을 보였다.(사진 가운데) 파바로티에게서 또 빼 놓을 수 없는 건 ‘쓰리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左), 호세 카레라스(中)와 함께 96년 일본 도쿄 공연 모습.(사진 아래)

6일 사망한 루치아노 파바로티는 기록을 많이 가진 성악가다. 가장 많은 커튼콜(165회)을 받은 연주자이면서 100장이 넘는 앨범을 발매해 클래식 부문에서 최고 판매기록을 내기도 했다. 1993년 뉴욕 센트럴 파크에서 연 콘서트에는 50만명의 팬이 몰렸다. 그는 세계 최고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 375회, 라스칼라에서 140회 출연하는 등 최고 주가를 올렸다.

 파바로티가 이처럼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데는 깨끗한 음성과 함께 친숙한 이미지가 큰 몫을 했다. 가족을 사랑하는 전형적인 이탈리아인으로 낙천적인 성격이 인기를 끌었다. 첫번째 부인과 이혼한 후 35세 연하의 여자친구와 2003년 결혼했지만 그는 항상 가족들과 환하게 웃는 모습으로 등장했다. 150kg이 넘는 거구에 얽힌 가십 등도 대중을 즐겁게했다. 화려한 셔츠와 늘 지니고 다니는 흰 수건은 그의 상징이 됐다.

 AP통신은 파바로티의 타계 소식을 들은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가 “신이 선사한 그의 목소리와 함께 그의 유머감각이 그립다”며 “함께 한 쓰리테너 공연에서도 그는 항상 즐거움을 선사하는 존재였다”라고 회상했다고 전했다. 이 때문에 파바로티는 오페라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한 성악가로 불린다.

 파바로티는 쉽게 성공하지 않았다. 빵 가게를 운영하는 아버지와 담배 공장에서 일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외동 아들로 태어난 그는 “돈이 없었기 때문에 축구선수가 되려고 했던 어린시절의 꿈을 접어야했다”고 기억했다. 학교 선생님이 되기를 바랐던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는 19세에 본격적인 성악 공부를 시작했다. 이후 지역 콩쿠르에 입상했지만 오페라 무대에는 진출하지 못하고 인근 학교의 음악 교사에 만족해야했다. 벌이가 좋지 않을 때는 보험 판매원으로 나서기도 했다.

 이탈리아의 에밀라 오페라하우스를 거쳐 소프라노 조안 서덜랜드의 추천으로 1965년 미국으로 간 뒤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그는 자서전에서 “내가 배운 모든 것은 지독한 노력으로 만들어졌다”고 썼다. 아주 가벼운 소리를 내는 레체로 테너에서 좀 더 부드럽고 깊이있는 성량을 선보이는 리릭 테너로 발전해 전성기 시절 거의 모든 레퍼토리를 소화할 수 있게 된 것도 끊임없는 연구와 노력 때문이었다.

한국에서는 1977년 처음으로 무대에 오른 후 2001년 쓰리 테너 공연까지 포함해 다섯 번의 음악회를 열었다. 음악 칼럼니스트 유형종 씨는 “높은 음을 가장 잘 낸다는 의미에서 붙은 별명 ‘하이 C(중간 ‘도’음에서 세 옥타브 위의 ‘도’)는 파바로티의 일부분일 뿐”이라며 “그는 고음 뿐 아니라 가사의 맛과 멜로디의 감수성을 기막히게 표현하는 최고의 테너였다”고 설명했다. 유족으로는 두번째 부인인 니콜레타 만토바니(37)와 막내딸 앨리스(4), 그리고 재혼 전 낳은 세 명의 딸과 손녀가 있다.

김호정 기자

◆‘천상의 목소리’=높은 음역에서 멀리 뻗어 나가는 맑고 깨끗한 파바로티의 음색이 마치 하늘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청아하게 들린다고 해서 붙어 다니는 수식어다. ‘리릭(서정적) 테너’의 대표 주자이면서도, 큰 체구만큼 우렁찬 목소리로 무대를 압도하는 독특한 특징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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