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칼럼>퇴직자와 사기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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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公職이든 개인기업이든 한 직장에서 신체적 조건으로 더 일할 수 없을 때까지 일하다가 停年을 맞는 직장인들은 아주 행복하다.한 직장에 오랫동안 봉직하다 부득이한 사유로 직장을 옮기거나직종을 바꾸게되는 직장인들은 정년퇴직자들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행복한 편이다.무능하다거나 잘못된 일에 연루되는등의 사유로 한참 일할 나이에 대책없이 직장을 떠나게 되는 경우가 가장 비참하다. 이같은 퇴직자들이 늘어나는 것은 정치 혹은 경제적 상황의 변화와도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우리나라의 경우 최근 몇년간의 경제불황에다 작년초 정권이 교체된 후 정부의 명예퇴직 유도와 司正작업의 여파로 自意든 他意든 대책없이 직장을 물 러나는퇴직자들이 계속해서 늘어나는 추세다.대책없는 퇴직자들이 사기꾼들의 사회에서 좋은「먹이」가 돼온 것은 새삼스런 얘기가 아니지만 더욱 늘어나는 추세에 편승해 그 수법도 훨씬 다양하고 교묘해졌다는 것이 檢.警 수사관계자들의 한결같 은 분석이다.
얼마전 한 경찰 수사관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매우 충격적이다.
공공기관이나 기업체에서 물러나는 사람들의 명단이 사기꾼 사회에서 은밀하게 거래되고 있다는 것이다.그 명단에는 대상자 개개인의 근무연한.퇴직금.학력.성격.능력등 詐欺에 필요 한 모든 자료들이 빠짐없이 곁들여져 있으며,퇴직금 액수가 많거나 퇴직 후의 代案이 없는 사람일수록 高價에 거래된다는 끔찍한 얘기다.
최근 어떤 공공기관에서 명예퇴직한 사람이 당한 詐欺는 대표적사례로 꼽을만 하다.작년 10월 퇴직해 어떤 夫婦로부터 출판사경영을 의뢰받고 11월부터 일을 시작한 후 5개월만에 느닷없이5억원의 빚더미 위에 올라앉게 된 그의 경우 는 한편의 완벽한드라마라 할 수 있다.그는 1억여원의 퇴직금과 2억원 상당의 집을 날려 당장 거리에 나앉게 된 것은 물론 주변의 친척.친지들에게 2억원의 빚을 갚아야 하는 딱한 처지에 빠진 것이다.굵직한 사건들에 밀려 보도되지조차 못하는 비슷한 사례들은 얼마든지 있다고 한다.
그같은 최악의 상황에까지 치닫게 된 일차적 책임이 피해 당사자에게 있음은 더 말할 것도 없지만 퇴직자 대상 사기사건과 관련한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와 法 운용에 관해서는 몇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요소가 있다.첫째는 은행의 당좌거 래 개설에 관한 관행이다.기업 운영의 활성화에 도움을 준다는 것이 본래 취지지만 당좌거래는 개설보증금 3백만원만 예치하면 개인이라도 이용이 가능하므로 詐欺에 이용돼도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주고 받는 사람들간의 신뢰가 당좌 거래의 기본적 전제라고는 해도 은행 창구가 매개로 되어있는한 詐欺에 이용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제도적 장치는 마련돼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게 피해자들의 일치된 항변이다.
둘째는 범죄자 처리에 대한 수사당국의 소극적 대응이다.앞의 詐欺피해자가 不渡직후 詐欺犯들을 고발했음은 물론이다.그러나 순서대로 처리를 기다리자면 범인들에게 해외로 도피할 시간적 여유를 주는 셈이 되므로 그는 주변의「충고」대로 또다 시 빚을 내「급행료」를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급행료」는 효력을 발휘해 우선 출국금지 조치를 얻어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더욱 이해할 수 없는 일은『이런 사건은 피해자가 직접 범인을 잡아오는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는 말이 수 사기관 주변에서 공공연하게 나돌고 있다는 점이다.수사비용을 피해자가 부담하면 예외라는소리도 들린다.수사권과 범인 체포권을 피해자에게 부여하는 이상한 사회가 돼가는 것인가.그렇다면 法은 누구를 위해,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진지하게 따져봄직하다.
***法운용에도 문제점 英國의 大詩人 W H 오든의「法은 사랑처럼」이라는 詩가 있다.그 마지막 스탠저는「법은 사랑처럼/어디 있는지 왜 있는지 모르는 것/사랑처럼 억지로는 못하고/벗어나지도 못하는 것/사랑처럼 우리는 흔히 울지만/사랑처럼 대개는못지키는 것」이라 한탄한다.역시 이 땅의 중견 시인인 앞의 詐欺피해자가 우리의 法을 詩로 읊는다면 과연 어떻게 표현될 것인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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