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엔 편지를 쓰세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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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호 02면

어쩜 하루 사이에 이럴 수가 있을까요. 날씨 말입니다. 이글거리던 태양이 밤새 힘 잃은 장사처럼 열기를 내려놓더니 서늘한 바람이 불고 찬 기운이 스며드네요. 순해진 햇빛 좀 보세요. 언제 더웠냐는 듯 시치미를 떼는 날씨 덕에 숨을 좀 고르며 9월을 맞습니다. 이번 주말이 백로(白露)이니 맑은 이슬이 내리고 나면 가을이 성큼 우리 곁에 들어서겠지요. 컴퓨터를 여니 메일 하나가 와 있네요. “정신없이 더위를 뚫고 왔더니 가을이네요.”

이런 추억 하나쯤 지니고 있으신지요. 동네 우체통 옆에 서서 우편집배원 아저씨를 기다리며 초조해하던 일. 밤새 신들린 사람처럼 펜을 달려 그리운 이에게 만리장성 같은 편지를 쓰고 난 뒤, 미루면 부치지 못할 것 같아 한걸음에 내달아 우체통에 던져넣지요. 아, 그런데 어둠이 걷히고 해가 떠올라 사위가 밝아오면 그토록 아름답던 글이 왜 그리 유치하게만 생각되는지요. 이를테면 ‘신이시여, 이 글을 제가 썼단 말입니까’ 싶었던 명문장이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을 만큼 치졸하기 그지없는 졸문(拙文)으로 떠오르는지….

그렇게 다시 거둬들여 부치지 못한 편지의 추억이 사위어들 무렵, 열병처럼 찾아왔던 우리의 청춘도 저만치 안녕을 고하며 떠나가 버렸지요. 누렇게 바랜 편지 묶음을 아직도 간직하고 계신 분께 노래 한 소절 보냅니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이제껏 읽은 편지 가운데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 교수가 수인(囚人) 생활을 할 때 가족에게 보낸 글을 모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입니다. 당시 무기징역을 살던 신 교수는 이렇게 썼지요.

“옥뜰에 서 있는 눈사람,
연탄 조각으로 가슴에 박은 글귀가 섬뜩합니다.
‘나는 걷고 싶다’.
있으면서도 걷지 못하는 우리들의 다리를 깨닫게 하는
그 글귀는
단단한 눈뭉치가 되어
이마를 때립니다.”

손으로 쓰는 편지가 사라져 가는 시대에 뜬금없이 웬 편지 타령이냐고 하실 분께 “가을이 왔잖아요”라고 말씀드리고 싶은 아침입니다. 하늘 한번 쳐다보세요. 이런 날 문득 떠오르는 이에게 편지 한 통 보내보세요.
중앙SUNDAY가 곱게 만든 엽서 보내 드릴게요. 마음을 담은 편지 쓰기로 올가을이 환해지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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