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티즌 '고구려 지킴이 운동' 빛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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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사를 자국의 역사에 포함하려는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 프로젝트에 대항한 네티즌들의 '고구려 지킴이 운동'이 힘을 얻어가고 있다.

미국의 일간지 워싱턴포스트는 지난 22일자 국제면 기사에서 "남북한이 중국의 고구려사 편입 주장에 강력 대응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워싱턴포스트는 "이는 중국 관변학계가 고구려가 고대 중국 왕조의 일부였다는 문서를 내놓으며 고구려의 중국사 편입을 시도하고 나섰기 때문"이라며 "베이징 관계자들은 고구려에 대한 역사적 주장은 순수한 학문적 논쟁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한국 정부는 중국측에 양국간 외교문제로 정식 제기하는 한편 고구려 연구학회를 발족키로 하는 등 대응에 나섰다"고 전했다.

이 신문은 특히 한국외대 여호규 교수(사학)의 발언을 인용해 "중국은 (고구려사에 대한) 그같은 색다른 주장을 폄으로써 향후 한국과의 영토분쟁에 대한 보험을 들어놓으려 하고 있다"며 "중국측이 그같은 주장을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며 티베트에 대해서도 그같은 정책을 펼쳤다"고 지적했다.

이 보도는 지난 17일 UNESCO(유엔 교육과학문화기구) 산하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가 북한내의 고구려 유적을 중국 영토에 있는 유적과 함께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등재하도록 권고키로 결정한 데 이어 나온 것이다. 이에 따라 오는 6월 말 중국 수저우(蘇州)에서 열리는 제 28차 세계유산위원회(WHC) 총회에서 북한 및 중국 고구려 유적의 세계문화유산 목록 등재가 최종 결정될 전망이다.

북한은 2002년 평안도와 황해도에 있는 고구려 고분 63개를 묶어 세계문화유산 지정을 신청했으나 중국 내 고구려 유산과의 비교 필요성 등을 이유로 등재 보류 판정을 내렸다. 중국은 지난해 1월 고구려 수도였던 오녀산성, 국내성, 환도산성, 광개토왕비, 왕릉 13기, 귀족 무덤 26기에 대해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신청했다.

이처럼 국제사회가 한국의 입장에 귀를 기울이게 된 것은 e-메일 보내기 등의 운동을 꾸준히 펼친 네티즌들의 힘이 적지 않게 작용했다. 지난해 12월 '동북공정 프로젝트'가 알려진 이후 국학원(www.kookhakwon.org)과 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www.historyworld.org)에서 전개한 서명운동에는 온라인 서명자 22만명을 포함해 1백24만여명이 참여했다.

또 메신저 대화명 앞에 고구려 역사를 지키는 삼지창을 상징하는 뜻으로 그리스문자 Ψ(프시.psi)를 다는 운동도 벌이고 있다.

인터넷 포털 다음의 '고구려 지킴이 카페(cafe.daum.net/Goguryeoguard)'는 개설된지 한달만에 '사이버 의병대'라 불리는 가입 회원수가 1천명을 넘어섰다. 이들은 "중국 주장대로 고구려사가 중국역사라면, 한강 이북 지역은 모두 중국의 역사로 편입되고 우리에게 남은 것은 5천년의 역사가 아닌 일본 역사보다도 짧은 2천년의 역사를 지닌 나라, 지역도 한강 이남으로 축소된 역사와 전통이 없는 보잘 것 없는 민족으로 전락하고 만다"고 주장했다.

또 '고구려는 기원전 37년부터 7백여년간 한국의 고대국가였다'는 제목으로 중국측의 주장을 반박하는 내용의 영문 서한을 작성해 ICOMOS와 세계 주요 언론사 등에 보내기도 했다. 실제로 ICOMOS 집행위원 모하만 하만 위원으로부터 '(고구려 유적 문제를 검토하는) 파리 회의 전에 글을 읽었고 메일의 내용에 큰 관심을 갖고 있다. 더 자세한 자료를 부탁한다'는 답신을 받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학원 측에서는 "애초에 가능성이 낮았던 북한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권고된 것은 지킴이 분들의 노력에 따른 쾌거"라며 "e-메일 보내기 프로젝트는 일단락 짓는 대신 한류 열풍을 이용해 연예인들이 '고구려는 한국의 찬란한 역사였고 중국에서 잘 관리해 주시기를 부탁한다'는 입장을 표명해 주도록 설득하는 일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이같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일부에서는 '항의 시위나 집단 e-메일 같은 감정적 대응보다는 중국에 맞설 대응 논리를 개발하고, 이를 토대로 국제사회를 설득하는 것이 낫다'는 견해도 나오고 있다. 공주대 정하현 교수(역사교육학과)는 "지금처럼 직선적이고 감정적인 대응은 '한국인들이 만주를 자신의 영토라고 주장하지 않느냐'는 식의 반사 효과를 일으켜 중국의 국수주의적 경향을 도리어 부채질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경기재 김기봉 교수(서양사)는 "고구려사가 반드시 한국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잠재 의식에는 '만주는 우리 땅'이라는 찬란한 민족사의 프로그램이 공유되어 있는 것 같다"며 "(한국과 중국 민족간의 분쟁이 아닌) 세계사적인 구도로 발생하고 있는 문제에 대한 처방을 민족사적으로 구하고 있는 현재의 한국사의 시각은 지양돼야 하며 전근대는 동아시아사의 관점으로, 근대는 세계사의 관점으로 조망하는 시각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창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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