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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남자들은 슈어홀릭

중앙일보

입력

프랑스의 루이 14세, 미국 인기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의 캐리, 이멜다 마르코스, 콘돌리자 라이스, 송혜교, 이들의 공통점은 뭘까? 바로 신발에 대해 강한 애착을 가진 슈어홀릭(shoeaholic 구두 중독자)이라는 점이다. ‘패션은 구두에서 끝난다’라는 말이 있듯, 구두는 패션의 완성인 만큼 국내에서도 신발에 대한 사랑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슈어홀릭이 늘고 있다. 하이힐에서 플랫슈즈까지 신체를 보호하기 위해, 때로는 권위와 지위의 상징으로, 유행의 첨병 역할을 자처해온 신발의 역사 속 이야기를 알아보자.

세계 최고의 슈어홀릭은?
전설적인 슈어홀릭을 논할 때 3천여 켤레의 구두를 모았다는 마르코스 필리핀 전 대통령의 부인 이멜다 여사를 빼 놓을 수 없다. 남편이 대통령 권좌에서 물러난 후 그녀는 발의 쾌락을 민생보다 더 중요시한 죄로 기소되기도 했다. “구두를 모으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라고 외쳐온 그녀가 자신의 구두를 모아 구두박물관까지 개관했다고 하니 슈어홀릭 중 으뜸이라 할 수 있다.
“섹스보다 마놀로 블라닉(명품 구두 브랜드)이 좋다”고 했다는 미국의 인기가수 마돈나, 구두 한 켤레로 버텨야 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 때문에 닥치는 대로 구두를 사들여 1천여 켤레를 소장하고 있다고 알려진 가수 머라이어 캐리, 아르헨티나의 영부인으로 국가적인 영웅이었던 에바 페론 역시 슈어홀릭으로 손꼽을만하다. 요즘 분위기 같으면 머잖아 우리나라에서도 이들에게 명함을 내놓을 만한 슈어홀릭이 등장할 추세다.

인류 최초의 신발은 샌들
최초의 신발 형태로는 초기 이집트 유물(B.C 3300년 경)인 샌들이 있다. 하지만 이때의 샌들은 종려나무 섬유나 파피루스(papyrus)잎 등을 꼬아서 만든 것으로 거친 땅으로부터 발을 보호하기 위해 나뭇잎이나 동물 가죽으로 발을 감싸는 수준과 비슷했다.
메소포타미아인은 이집트인과 같이 B.C 3000~B.C 2500년까지 거의 맨발이었고, 왕이나 귀족만이 신발을 신었다고 한다. 하지만 메소포타미아인의 샌들은 초기부터 가죽으로 만들었으며, 이집트인의 샌들에 비해 발꿈치와 측면을 싸도록 된 형태로 메소포타미아 지대의 지형과 기후의 영향을 많이 반영한 것 같다.
신발 형태와 장식은 주로 그 지역 사람들의 성향에 따라 다른 모습이었으며, 우리나라는 짚신이나 나막신, 운혜(마른날 신는 부녀자용 가죽신), 흑혜, 당혜, 목화, 태사혜 등이 사용되었다.

루이 14세가 애용한 하이힐 ‘초핀느’

‘태양왕’으로 불리는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화려한 신발에 큰 애착을 가졌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초상화를 보면 빨강 굽에 크림색 하이힐을 신고 있다. 당시 빨강 굽은 귀족만이 신을 수 있는 권위의 상징이었다.
루이 14세가 슈어홀릭이 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절대왕정의 전성기를 보냈던 그에게도 한 가지 큰 열등감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작은 키였다. 16~17세기에 크게 유행했던 초핀느(Chopine)는 받침 형태의 높고 두꺼운 굽이 달린 구두로 힐의 높이가 40cm에 이르는 것도 있어서 혼자 걷기에는 아슬아슬한 신발이었다. 하지만 뒤축이 높은 초핀느는 키가 커 보이길 원했던 루이 14세에게 큰 사랑을 받아 더욱 유행했고, 상류층 남성들도 많이 신었다고 한다. 여성들의 신발인 하이힐이 원래는 남성들의 신발이었던 셈이다.
하이힐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17세기 유럽의 도시에는 화장실이 따로 없었다. 밤새 생성된 배설물을 주로 거리로 던졌고, 오물로 더러워진 거리를 걷기 위해서는 높은 굽이 필요했던 것. 이후 남성들은 전쟁터에서 높은 굽을 신고는 싸우기가 힘들어 더 이상 하이힐을 신지 않았다.

칼리굴라가 처음 신었던 신발 ‘칼리가’

미국 북부 인디언의 모카신과 함께 신의 원형 중 하나이고, 고대 이집트의 유품에서도 발견된 적이 있는 신발은 바로 샌들이다. 고대 이집트의 샌들은 왕족이나 승려, 귀족에게만 허용되어 권위를 표시하는 상징이었다. 현재 우리가 즐겨 신는 샌들의 형태를 정착시킨 것은 바로 로마시대의 샌들이다.
로마 군인들이 신었던 칼리가(caligae)는 악명 높은 황제 칼리굴라가 처음으로 신었던 것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로마에서는 병사나 민간인 모두 샌들을 신었는데 오랫동안 걸어도 신발이 해지지 않도록 밑창에는 쇠 징을 박았다.

거룩한 신을 찬양하기 위한 ‘크래카우’

14세기말 중세 시대 멋쟁이들의 필수품은 크래카우(cracows) 또는 쁠레엔(poulaines)이라 불리는 끝이 길고 뾰족하게 올라간 신발이었다. 기독교가 득세했던 당시에는 모든 건축물에 종교 이념을 나타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거룩한 신의 숭고한 뜻을 나타내기 위해 신발도 하늘로 좀 더 높이 올라가는 형태로 만들어졌고, 크래카우 중에는 앞코의 길이가 무려 60cm나 되는 것도 있었다. 때문에 크래카우를 신고 계단을 오를 때는 엉켜 넘어지지 않도록 뒷걸음질로 올라가야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신을 숭배하기 위해 만들었던 크래카우가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마녀들의 신발과 비슷한 것은 아이러니다.

마법의 아랍 구두 ‘바부슈’

아프리카에 속하면서도 유럽과 이슬람 문명이 어우러져 독특한 문화적 색채를 나타내는 모로코. 바부슈(babouche)란 전통적으로 모로코인이 신었던 가죽제품의 슬리퍼를 말한다. 바부슈는 프랑스어로 ‘마법의 구두’를 의미한다. 모로코에서는 많은 사람이 전통신발인 바부슈를 신고 다녔는데, 남성은 발끝이 날카로워진 형태를, 여성은 둥근 형태를 주로 신었다. 바부슈는 뾰족한 앞코에 검은색 솔방울이 달린 형태가 많다.

네덜란드의 나무신발 ‘크롬펜’

나무신발은 우리나라에서는 나막신, 일본에서는 게다, 프랑스농부들 사이에서는 사보, 다마스커스에서는 카카보 또는 보카라, 소련에서는 카후루나 카후시 또는 쮸빈, 네덜란드에서는 크롬펜 혹은 사보라라고 불린다. 산업혁명 당시 프랑스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일자리를 위협하는 기계 도입을 반대하며 톱니바퀴나 벨트 사이에 사보(sabot 나무신발)를 끼워서 기계를 멈추게 했고, 이것에서 유래된 말이 사보타주(sabotage), 즉 ‘파업’이란 뜻이다.
부유한 귀족들은 가죽신을 신었고, 일반 평민들은 물이 들어오지 않는 크롬펜을 신었다. 과거에는 이탈리아 포플러 종류의 나무를 끌이나 도구를 사용해 신발 모양을 파서 신었는데, 요즘은 기계를 이용한 전문공장이 많이 있다고 한다.

중국여인의 눈물의 창고 ‘전족’

신발에 관해 가장 가슴 아픈 역사를 가진 것은 아마도 중국여인들의 전족일 것이다. 작은 발이 미의 절대적 기준이 되고 성적매력의 잣대로 통용되면서 10세기 이후 1천여 년이 넘도록 강요해온 중국 남성들의 작은 발 선호사상과 전족을 신은 여인의 삶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들이 있지만 여성의 입장에서 보면 이건 형극이 아니라 죽음 그 자체가 아닐런지. 조그만 연꽃잎 안에서 세 치 정도 되는 신발을 신고 춤을 추어야 했던 여성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전족을 본다면 제아무리 담 큰 슈어홀릭이라도 고개가 숙연해 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미래의 신발은?
“나는 너를 신기 위해 사는 거야, 멋있어지고 싶거든. 남자는 변하지만 너는 변하지 않아. 나는 내게 꼭 맞는 그 무엇이 필요해. 쉽고 편한 것은 재미없어. 고통이 따르지만 길들이면서 쾌감을 느끼잖아. 지구상에 내가 없다면 너도 필요 없어. 너는 나의 삶이야.”
하이힐에는 여성의 본능과 철학이 감춰져 있다. “난 섹시함 따위에는 관심 없어, 부럽지도 않아.”그러면서도 하이힐을 고집하는 게 여자다. 프로이드는 “발은 원초적 성적 상징이며 구두는 여체를 상징한다”라고 했고, 작가 린다 손탁은 “하이힐을 신는 것은 섹스어필을 위한 것”이라 했다.
아마도 동물적 감각의 촉수를 가진 여성이라면 느낄 것이다. 저 이상하게 생긴 것을 신으면 높아지고 싶은 욕망, 유혹하려는 본능, 여성스러워지고 싶고 우아해지고 싶고 신분상승을 해 보고 싶은 마력의 엔돌핀이 솟구쳐서 결국 하이힐에서 내려오지 못한다는 것을.
아름다워지고 싶은 여성의 욕망이 있는 한, 신발의 높이를 누가 꺾을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신발은 스스로 진화하고 있다. 여성들의 다양한 욕망과 발맞추어.

장치선 객원기자 charity19@joins.com
사진 중앙일보 사진 자료실, 임영식의 구두 이야기 www.shoes.pe.kr, blog.naver.com/5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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