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해는뜨고 해는지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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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제1부 불타는 바다 길고 긴 겨울(36) 길남은 저도 모르게어금니를 악물면서 몸을 돌렸다.등어리를 타고 차가운 얼음덩어리라도 흘러내려가는 듯 싶었다.전연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었다.성식이가 탈출을 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그럴 수 밖에 없었다.그는 조그만 체격에 그나마 어깨가 앞으로 휜듯한 것이 몸도 많이 말라 있었기 때문에 누구나 그를 약골로 보았었다.그래서 누구도 그와 같은 조가 되어 탄을 캐러 나가는 걸 싫어했었다.게다가 날씨만 궂어도 콜록거 리며 기침을해대거나 배가 아프다고 드러눕기가 예사여서,노무계에서도 눈밖에난 인부 가운데 하나이기는 했다.
그러면서도,이제까지 크게 무슨 일이 없었던 건 채탄작업에서만은 제 몫을 해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몸이 아픈 것은 고사하고 일을 제대로 해내지만 못해도 대막대기로 두들겨 맞거나 노무계 지하실로 끌려가 시퍼렇게 멍이 들어서 나오는 게 흔한 형편으로 볼 때면,오히려 성식이는 독종 소리를 듣는 편이었다.
『저래서 되겠나? 이골이 날 게 따로 있지,쟤는 매맞는 데 감초라… 안 낄 때가 없으니….』 단골로 노무계 사람들에게 끌려가는 사람들을 볼 때 마다,딱한 마음에 혀들을 차기는 했지만그렇다고 그를 감싸 주는데도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노무담당자들에게 눈밖에 난 사람을 감싸려 들다가는 자기마저도 한통속으로 몰려 매찜질 을 당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그 몸으로나마 꾀부리는 일은 없었기 때문에 겨우겨우 버텨가는구나 싶은 게 옆에서 보는 성식이의 하루하루였다.그런 성식이가 섬에서 도망을 치겠다는 생각을 굳히고 있었다는 건 길남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숙소로 걸어오면서 길남은 내내 입술을 꾸욱 다물고 있었다.큰일이구나 싶었다.만약 명국이와 함께 탈출하기로 한 날이 점점 다가오는데,어느 날 불쑥 성식이가 일을 쳐버리면 모든 건 물거품이 되는 게 아니겠는가.
도망자가 생겼다 하면,그날부터 노무자들에 대한 감시는 여간 철저해지는 것이 아니었다.탈출에 성공해서 그가 영 돌아오지 않을 경우는 그날부터 남아 있는 노무자들에게는 몇 배 삼엄한 경비가 시작되었고 그 앙갚음을 당하는 쪽은 언제나 남아 있는 노무자들이었다.채탄작업은 더욱 가혹해졌고 그 고달픔으로 초주검이될 수밖에 없었다.그러나 이 경우 노무계에서는 가능한한 도망자가 나왔다는 사실을 숨기려 들었기 때문에 좀 덜한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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