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설 맞아 찾아가 본 총선 민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5면

▶ 총선 민심읽기로 정치권이 긴장한 설 연휴 동안 고향에서 이야기꽃을 피웠던 귀성객들이 서울역을 빠져나가고 있다. [연합]

2천6백여만명-. 설 연휴 전국의 귀성객 수다. 이 숫자만큼 서울에서 광주로, 광주에서 부산으로… 전국의 민심은 한데 뒤섞였다. 민주당 조순형 대표의 대구 출마도, 열린우리당의 올인(All-in) 전략도, 한나라당의 물갈이도 귀성객의 입을 타고 전국에서 얘기꽃을 피웠다. 총선을 80여일 앞두고 설 민심을 직접 찾아가 봤다.

*** 광주.전주 "당보고 무조건 찍지 않아"

대한(大寒)이 낀 설 연휴 동안 광주엔 쉼없이 눈보라가 몰아쳤다. 꽁꽁 얼어붙은 도시 마냥 3개월도 안 남은 총선을 보는 시민들의 시각도 싸늘했다.

"누구 할 것 없이 몽땅 도적놈들 아니요? 서민들은 죽겄는디 돈이나 받아 처묵고…."

지난 21일 서구 양동시장에서 만난 김형석(54.자영업)씨는 불법 대선자금 수수 등으로 얼룩진 정치권에 대해 "말도 하기 싫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예상 대진표와 거물급 인사의 출마설 등이 언론을 통해 전해져도 많은 시민은 누가 무슨 당으로 출마하는지 통 알지 못했다.

◆아성(牙城) 붕괴되나=정치권에 대한 비판은 그러나 '깃발만 꽂으면 당선'이란 통념을 깨는 조짐을 낳고 있었다. 그 모습은 민주당에 대한 애증의 교차로 표출됐다. 22일 광천동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만난 이한성(54.무역업)씨는 "집안 형님들을 만났더니 '노무현 대통령이 분당으로 배신했다'고 하더라"고 했다. 그러나 여수를 다녀오던 이재용(59)씨는 "무조건 민주당 찍었지라. 근디 인자 그런 시대는 가부렀소"라고 단언했다.

대신 민주당에 대한 호.불호와 관계 없이 정치권 전체의 물갈이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컸다. 금남로에서 만난 이정규(60)씨는 "수십년 지지했는디 민주당이 왜 짠허지(안타깝다의 사투리) 않겄소. 그래도 오래 해묵은 사람들은 물러나고 참신한 인물을 내보내야지라"라고 주문했다.

◆DJ, 김홍일, 정동영 변수=예전같지 않은 호남 민심엔 '절대적 기준'이던 김대중(DJ)전 대통령의 영향력이 준 것도 요인인 듯했다. "김홍일 의원이야 무소속으로 나와도 당선은 되겄지요. 허나 옛날처럼 DJ가 뭐라는지 쳐다보는 이들은 많지 않어요." 택시운전을 하는 이효남(47)씨는 달라진 환경을 이렇게 전했다. 그렇다고 빈 자리를 盧대통령이나 열린우리당이 차지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전남대 앞에서 만난 이형욱(51.자영업)씨는 "묵고 살기 힘든디 대통령 인기가 좋을 리 있소. 정동영씨가 의장 됐습디다만 지켜봐야지라"라고만 했다. 상대적으로 전북에선 '정동영 효과'가 어느 정도는 감지됐다. 전주에 사는 한 회사원(39)은 "이 지역 출신인 鄭의장이 선출된 후 열린우리당을 밀자는 말이 많아졌다"고 했다.

서울에서 광주를 다녀간다는 김형민(53.회사원)씨는 헷갈려 보이는 호남 정서를 이렇게 정리했다. "젊은 조카들은 열린우리당에 관심을 보입디다만 아직은 '그래도 당은 민주당'이란 의견이 많은 것 같아요. 하지만 결국엔 어느 정당이 좋은 사람을 내보내는지가 중요할 듯합니다. 비리에 연루됐다면 전직 대통령들의 할애비가 와도 안 찍겠다고 하던데요."

광주.전주=김성탁 기자

*** 대구 "趙대표 출마 뜻은 좋지만 …"

"당대표니까 민주당에 한 석 정도는 줘도 안되겠나 하는 마음이 들긴 드는데 설 연휴 동안 얘기해 보니 당선될 거라는 사람이 없어서…."

23일 택시기사 김상규(50)씨는 나흘 전(19일)의 민주당 조순형 대표의 대구 출마 선언을 대뜸 화제로 꺼냈다.

"하기 힘든 결단을 내렸는데…"라며 말꼬리를 흐리는 그에게 "오늘 당장 투표한다면 趙대표를 찍겠느냐"고 묻자 고개를 저었다. 민주당 趙대표의 출마를 맞는 대구 민심은 착잡한 표정이다.

"뜻은 좋지만 지역구도 미리 안 정한 걸 보면 이벤트 같다. 왜 하필 대구냐."(곽기철.41.회사원)

설 연휴 대구에서는 정치 얘기만 나오면 趙대표의 출마 선언이 화제에 올랐다. 그만큼 '조순형'이라는 이름 석자의 인지도는 수직 상승했다. 그러나 趙대표의 출마가 주는 정서적 충격의 여운은 시간이 갈수록 엷어지고 있었다.

지난 22일 중앙로역. 사업을 한다는 서지수(44)씨는 "이회창씨가 낙선하자 눈물까지 흘린 게 대구 사람들인데 민주당에 마음이 쏠리겠느냐"면서 "솔직히 대구 사람들을 시험 대상으로 삼는 것 같아 기분도 안 좋다"고 말했다. 특히 徐씨처럼 "부담스럽다" "기분이 나쁘다"는 말을 하는 시민들이 적지 않았다. 대구 남구에서 한나라당 공천을 신청한 신동철(43.부대변인)씨는 그 이유를 이렇게 진단했다. "趙대표가 어려운 결단을 한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대구는 정치적으로 '친노' 대 '반노'의 대립구도가 선명한 곳이다.

그런 점에서 자칫 趙대표의 출마가 이 구도를 흐트러뜨릴 수 있다고 판단한 한나라당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부정적 여론이 확산되는 것 같다."

하지만 趙대표의 출마가 대구 민심을 흔들어 놓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특히 한나라당에 대한 불만을 제고시켰다는 것이다.

민주당은 그러는데 한나라당은 뭐하고 있느냐는 불만이다.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에이스리서치의 조재목 대표는 24일 "지역 정가가 부산해졌다. 권기홍.윤덕홍 전 장관 등을 앞세운 열린우리당의 올인 전략과, 한나라당의 물갈이 등에 대한 정치적 관심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대구=박승희 기자

*** 부산 "盧에 기대도 안할랍니다"

"가들이 눈데?(그 사람들이 누군데?)"

설날인 지난 22일 30년째 부산에서 운전을 하고 있다는 개인택시 기사 이수건(68)씨는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17대 총선에서 부산에 출마할 것으로 보도된 청와대 출신 인사 두명의 이름을 아느냐고 묻자 보인 반응이었다. "먹고 살기 힘들다. 수입이 예년의 60%밖에 안 된다"고 푸념도 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퉁명스럽다고 생각했는지 李씨는 "즈그(자기네)가 서울에서야 이름이 났을지 몰라도 여(여기)서는 아무도 모른다 아이가"라고 말을 보탰다. 그는 "막상 찍을라카면 정이 무섭다고, 내 또래 사람들은 또 한나라당이지 싶다"고 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후 정치적 고향인 부산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 왔다. 내년 총선은 그 열매를 수확할 수 있을지를 가늠하는 잣대다. 부산발 '노풍(盧風)'의 강도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다.

그러나 바닥 민심만으로는 아직 미풍인 것같다. 지난 대선 때 盧대통령을 찍었다는 회사원 이도규(29)씨는 "2002년 대선 땐 아무리 늦게 귀가해도 밤새 인터넷을 봤다 아임니꺼. 근데 이번 총선엔 누가 나오는지 관심도 없습니더"라고 말했다. "투표 안할 것 같아예"라고도 했다. 李씨는 "솔직히 盧대통령한테 기대가 컸는데 지금 정치가 달라진 게 뭐 있습니꺼. 언(어느)놈이 나와서 또 도둑질해 먹을라는지…"라며 한숨을 쉬었다. 盧대통령에 대한 애증이 교차하는 표정이었다.

이런 분위기를 감지한 때문인지 지난해 말 열린우리당 출마를 저울질했던 A씨 등 몇 명은 최근 '예상을 깨고' 한나라당에 공천 신청을 했다. A씨는 "어음보다는 당장의 현찰에 더 마음이 쏠리는 게 인지상정 아니냐"고 말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한나라당의 '부산 싹쓸이'가 재현될 것이라고 자신하는 사람도 드물다.

지역에서 오랜 기간 통.반장을 지낸 安모(54)씨는 "열린우리당 사람들의 인지도가 너무 떨어지지만 그렇다고 한나라당이 현역 의원을 그대로 내면 위험할 겁니더"라고 경고했다. 한나라당 정의화(부산 중-동)의원도 "부산 민심은 '당보다 인물 보고 찍겠다'고 할 정도"라며 "한나라당에도 주의보가 내려진 상태"라고 했다.

부산=이가영 기자

*** 설연휴 3당 "바쁘다 바빠"

설 연휴에도 각 당 대표의 '민생 행보'는 쉬지 않았다.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PK 공략'=한나라당 최병렬 대표는 24일 김해에서 당원들과 재첩국으로 조찬을 하며 총선 승리를 다짐했다. 4개월 만에 이뤄진 PK(부산.경남) 방문 이틀째다. 崔대표는 이 자리에서 대선 자금 문제로 수감 중인 김영일 의원의 공천 방침을 시사했다. 참가한 지구당원들의 어깨가 '으쓱'해졌다고 한다. 곧바로 부산으로 넘어온 崔대표는 구속 후 건강 때문에 병원에 있는 안상영 부산시장을 찾았다. 崔대표는 "김혁규 지사는 압력에 못 이겨 나갔는데 밖에서 安시장은 지조가 있는 사람으로 여긴다"고 위로했다. 일부 한나라당 출신 단체장의 탈당설이 나도는 시점이라 崔대표는 '민심 다독거리기'에 열을 올렸다.

◆귀가 번쩍 뜨인 趙대표=민주당 조순형 대표는 23일 환경미화원들과 점심을 함께 하며 모처럼 활짝 웃었다. 대구 출신인 한 미화원으로부터 "趙대표가 대구에서 승리해 국민통합을 이뤄달라"는 당부를 받고서였다. 趙대표는 귀가 번쩍 뜨이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대구에 친지가 있으면 꼭 전화해 달라"고 부탁해 좌중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趙대표는 설 연휴 내내 민생 행보를 계속했다. 24일엔 서울시 상수도사업소를 방문했다.

◆"민생 투어에 올인"=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은 취임 이후 계속해온 '민생 투어'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23일 안양의 보육원을 방문했고, 24일엔 충남 아산에 위치한 한 컴퓨터 저장장치 업체를 찾았다. 鄭의장의 민생투어가 계속되자 당 일각에서 "이벤트는 이제 그만해야 한다"는 불만이 나왔다. 하지만 鄭의장은 "나는 민생투어로 총선에 올인하겠다"고 말했다. 연휴 동안 그는 보육원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설거지를 하기도 했다.

신용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