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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안정이냐 통일이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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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자고로 명장(名將)은 전투를 벌이기에 앞서 싸울 장소를 탐색한다. 장소의 선택은 전투의 승패를 결정하는 고도의 전략적 결단이기 때문이다. 올 대선의 전투에서 싸움 장소를 골라잡은 것은 여권 프리미엄을 누리는 민주신당 측으로 보인다. 구체적 일정을 결정한 것이 북한이라고 하지만 결과적으로 선거를 두 달 앞둔 10월 남북 정상회담은 민족과 통일이라는 강한 어젠다를 던질 것이다.

범여권은 평화통일이라는 깃발을 들고 남북 관계라는 계곡에서, 경제 선진화의 구호를 외치며 달려오는 한나라당의 대군을 막아보려 하고 있다. 수적으로 우세인 한나라당은 미리 눈치라도 챈 듯 한반도 평화 비전으로 양보하는 척하며 상대를 계곡에서 경제 정책의 평야로 끌어내려 하고 있다.

다가오는 전투를 관전하는 책상물림의 눈에는 ‘성공한 CEO가 나라 경제도 살릴 수 있다’는 논리만큼이나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대북 정책이 통일을 준비한다’는 주장이 취약하게 보인다. 남북한 사이 신뢰를 구축하기 위해 잘사는 남이 북을 지원하고, 평화를 유지하면서 북한의 경제를 발전시키면 자연스럽게 통일이 된다는 설명이다.

여권의 덕담은 논리적으로 모순됐을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그 실현 사례를 찾아볼 수 없다. 그중 으뜸은 한국의 경제적 지원을 통해 북한을 강하게 만들면 통일의 발판이 된다는 주장이다. 우선 경제적 지원이 북한의 발전은 돕지 않고 김정일 세습 독재에 영양만 공급해 줄 가능성도 크다. 설사 경제가 발전한다고 가정하더라도 정치적으로 강화된 북한은 통일보다는 독자적인 길을 가면서 남한과의 경쟁을 선호할 것이다. 결국 가장 성공적인 경우에 역설적으로 통일의 길은 멀어지는 것이다.

정부의 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주 동원되는 사례가 서독의 오스트폴리틱(Ostpolitik), ‘동방정책’이다. 1970년대 서독 사민당의 동방정책은 기존의 적대적 경쟁 관계를 청산하고 상호 인정에 기초해 동독을 지원하는 정책이었다. 이 정책은 동·서독 간 평화 공존에 어느 정도 기여했지만 독일이 통일한 것은 소련에서 시작된 개혁과 개방의 바람이 동독에 전파되면서 공산 독재를 붕괴시켰기 때문이지 동방정책 덕분은 아니다.

정상회담을 앞두고 던져진 또 다른 화두 중 하나가 유럽을 염두에 둔 남북 경제공동체라는 개념이다. 하지만 지난 반세기 동안 유럽경제공동체(EEC)와 그 뒤를 이은 유럽연합(EU)이 가입의 필수 조건으로 내세웠던 것은 바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즉 공통의 정치·경제 제도와 철학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세계사는 한번 만들어진 경계와 국가가 아무리 인위적인 것이라고 할지라도 점차 강화되고 지속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일례로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의 국경선은 식민 제국의 행정적 편의로 그려 놓은 것이지만 독립 후에도 크게 변하지 않고 유지돼 왔다. 다른 한편, 같은 문화와 풍습과 언어를 가지고 있으며 심지어 동질적인 시장경제와 민주체제를 보유하고 있음에도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통일하지 않는다. 나아가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것은 민족이 달라서가 아니라 이익이 갈렸기 때문이다. 서로를 국가로 인정하고 국제사회가 이를 공인할 경우 통일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믿는 중국이 외교력을 총동원하며 대만을 부정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이처럼 남북 관계에서 평화안정과 통일은 양자택일의 성격이 강하다. 돈으로 평화를 사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가 민주주의를 포기하지 않는 이상, 통일의 가장 현실적인 방안은 여전히 독일식 흡수 모델뿐이다. 남한에서 민주화 세력을 자처하는 진보가 북한에 대해서는 개발 독재를 처방하고, 근대화 세력이라 자임하는 보수가 갑자기 인권을 주목하는 것이 한국 정치의 묘미이기는 하지만 이들이 전투를 벌이느라 우리 모두가 한국의 미래라는 전쟁에서 지고 마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조홍식 숭실대 · 정치외교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