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러리의 곤욕(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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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미국 퍼스트 레이디의 이미지를 형성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인용되는 것이 정치적 영향력이다. 백악관에서 남편의 정책결정에 대한 아내의 정치적 영향력은 긍정적인 측면에서는 내조일 수 도 있지만 부정적인 측면에서는 쓸데없는 간섭일 수도 있다는 점에서 퍼스트 레이디의 이미지를 곧잘 크게 뒤바꿔 놓는 것이다.
미국의 역대 퍼스트 레이디 가운데에서 「정치에 가장 잘 끼어들었던」 여성으로는 28대 월슨 대통령 부인이 꼽힌다. 그녀는 남편의재임기간중 마지막 18개월동안 사실상 행정부의 최정상 노릇을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32대 루즈벨트 대통령 부인은 장관들의 업무에 일일이 간섭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당시 내무장관이었던 아이케스는 일기장에서 그녀가 「가장 병적이며 무례한 퍼스트 레이디」였다고 격렬하게 비난했다. 남편에게 최강의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던 퍼스트 레이디는 카터 대통령 부인이었다는게 정설처럼 되어 있다. 반면 정치적으로 극히 자제하면서 내조했던 퍼스트 레이디로는 쿨리지·트루먼·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부인들이 손꼽힌다.
미국의 경우뿐만 아니라 어느 나라든 퍼스트 레이디들의 정치적 간섭내지 영향력은 대통령 자신의 성격이나 아내 다스리는 능력 따위들과 상대적으로 긴밀하게 연관돼 있다. 아내가 아무리 정치적 성향이 강하다 해도 남편 일에 끼어드는 것을 강력하게 봉쇄한다면 퍼스트 레이디가 정치적 치맛바람을 일으키는 것은 불가능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클린턴 대통령이 취임했을 때도 많은 사람들이 힐러리의 역할에 대해 우려반 호기심반의 시선을 던졌었다. 그러나 취임직후 미국의 정치가 「빌러리 체제」에 의해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냐는 얘기가 조심스럽게 흘러나오면서 우려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최근 미국사회를 온통 시끄럽게 하고 있는 「화이트워터 사건」도 그 경위나 진상이야 어떻든 힐러리 자신은 두말할 것도 없고 남편인 클린턴 대통령의 이미지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혔음에 틀림없다. 힐러리가 뒤늦게 「실수」를 시인하면서 사태의 진화에 나섰지만 쉽게 가라앉을 것 같지 않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번 일을 거울삼아 퍼스트 레이디의 진정한 역할이 무엇인가를 스스로 깨닫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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