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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과 사막, 허무의 공간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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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호 13면

독일 소설가 토마스 만은 데카당스 문학의 거장이다. 특유의 퇴폐적인 테마는 독자에게 사고의 어떤 확장을 경험하게 한다. 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마의 산』에서 단 하나의 주인공을 꼽으라면 단연 ‘질병’이다. 병든 정신은 물론 퇴락의 징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예술적 창의의 원천이거나 또는 무정부적 가치관의 기초가 된다. 질병을 통해 비로소 견고한 제도의 균열을 더욱 명료하게 보는 것이다.

-토마스 만의 『베니스에서의 죽음』, 퍼시 애들런의 ‘바그다드 카페’

장편 『마의 산』과 비슷한 구조로 씌어진 데카당스의 대표적인 단편이 『베니스에서의 죽음』이다. 베니스라는 동화적일 정도로 아름다운 해변에서 한 원로작가가 미소년에게 사랑을 느끼는데, 불행하게도 그때부터 그는 시름시름 앓는다. ‘마법에 걸린 산’처럼 베니스의 해변도 병에 걸려, 그 많던 관광객도 대부분 떠나버리고 백사장엔 죽음의 그림자만 길게 드리워져 있다. 콜레라가 도시 전체를 집어삼킨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열병에 걸린 작가는 이성을 잃은 사람처럼 단지 소년의 모습을 한 번 더 보기 위해 해변에 머물다, 햇볕이 내리쬐는 백사장에서 그만 죽고 만다.

아무도 없는 해변의 고립된 느낌과 죽음이 던지는 허무한 슬픔은 소설 『베니스에서의 죽음』에 대한 영원한 이미지로 남는다. 그만큼 『베니스에서의 죽음』에서 압도적인 이미지로 기억되는 것은 주인공이 죽는 적막한 해변이다. 죽은 공간의 허무함에 대한 명상, 『베니스에서의 죽음』이 걸작으로 남을 수 있는 최소한의 매력이다.

퍼시 애들런의 ‘바그다드 카페’(1988.사진)는 사막과 같은 고립된 공간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어느 카페에서의 이야기를 다룬다. 카페인지 창고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지저분한 건물이 쓰레기들이 굴러다니는 황량한 벌판 위에 서 있다. 독일에서 여행 온 여성은 하필이면 이곳으로 숙소를 정하려고 한다. 한눈에 봐도 이곳은 희망이 없는 곳이다. 잿빛 땅과 부서지고 해어진 집과 가구들, 그런 공간처럼 메말라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까지 황량하기 짝이 없다.

월세도 제대로 낼 것 같지 않은 어떤 여성이 카페 바깥에서 빈둥거리며 읽는 책이 토마스 만의 『베니스에서의 죽음』이다. 아마도 이 책을 읽는 여성은 세상과의 끈을 이미 놓아버렸으리라. 도시의 시계를 던져버린 맥 풀린 은둔자에게 더 없이 적절한 소설인 까닭이다. 게다가 황량한 주변 환경과 이 카페가 얼마나 고립되고 외로운 공간인지를 상징하는 데에도 적합하다. 영화는 이렇게 『베니스에서의 죽음』처럼 죽은 공간이, 기적처럼 생의 환희가 넘치는 곳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소설이 비극이라면, 영화는 그런 비극적인 공간을 이용하여 극적인 희극으로 반전된다. 곧 ‘죽은 공간’ 베니스에서 영화제가 열린다(8월 29일~9월 8일). 그곳에도 당분간 생의 환희가 물결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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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호씨는 미술과 몸을 섞은 영화 이야기『영화, 그림 속을 걷고 싶다』『영화, 미술의 언어를 꿈꾸다』로 이름난 영화평론가이자 영화사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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