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있는아침] ‘심경(心經)0’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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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심경(心經)0’- 하종오(1954<2009>~ )

똥을 누며 산바라기하니,

옆으로 옆으로 산은 등성을 옮겨가고,

텅 비는 산맥에 싸락눈 치네.

내 육신도 아래로 아래로 벗어나네.

30대의 악몽에 시달리던 하종오가 마흔을 넘겼을 때 쓴 시다. 도시인들은 아파트 1, 2, 3층 혹은 17, 29층에서 변을 보겠지만 이 화자는 산이 보이는 정방에서 변을 보고 있다. 그러나 싸락눈 치는데야 이만 한 배설의 법열이 있을까. 바람 치고 거기 눈송이도 섞였으니 세월은 겨울 속에 잘도 갔으리. 나는 이 기이한, 앞이 툭 터져 산이 비치는 정방에 혼자 앉아 있다. 친구여 나는 ‘텅 빈 산’의 육신이다.

<고형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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