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썰렁해진 인천 중국 인재-한중수교에도 찬바람 여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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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韓中수교 이후 인천과 중국의 청도.위해.천진을 연결하는 여객선 취항등으로 옛 명성을 되찾을 것으로 기대됐던 인천의 이색지대「차이나타운」이 여전히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
인천역에서 자유공원쪽으로 가파른 비탈길의 차이나타운(중구선린동 일대)은 한때 1만여명이 넘는 화교들과 수백여 상점들이 꽉들어차 인천 최대 번화가로 이름을 떨쳤으나 이제 몇몇 청요리 집만 명맥을 유지할 뿐이다.
이곳에 찬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은 60년대 화교들에 대한 무역업규제등 잇따른 경제활동 제재조치에 이어 80년대 이후 신포동을 중심으로한 거대한 새상권형성 이후부터였다.
중국인촌이 형성된 것은 고종 19년(1882년)청나라와 통상조약을 체결한이후 1885년 元世凱가 주한대표로 부임할때 따라들어온 한 무리의 거상들이 커다란 점포를 이 지역에 세우면서부터. 1937년 中日전쟁후 상권이 일본으로 넘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청국 상인들이 주단.포목.의약품등을 들여오고 양곡류를 실어가는등 교역이 활발해 한때 중국과의 무역규모가 對日교역액 84만5천圓의 2배에 가까운 1백58만9천圓에 이를 정 도로 크게 번성했던 곳이다.
당시 중국 이주민수가 인천 인구 5만6천여명의 16%인 1만여명에 이르러 화교들이 선린동뿐 아니라 인근 경동.내동일대까지모여살며 위세를 떨치기도 했었다.
그러나 中日전쟁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화교수는 50년대 1천여가구에서 60년대 5백여가구,70~80년대 1백50여가구로 줄어들었고,90년대에 들어서는 1백여가구만 남아 차이나타운을 지키고 있다.
이 때문에 현재 이곳에는 4대째 산동지방 고유의 빵인 속칭「공갈빵」(중국식 찹쌀떡)을 만들어 파는「豊美」등 청요리집 4곳과 중국풍 건물의 구멍가게 1곳만이 외롭게 차이나타운 옛 그림자를 이어가고 있을 뿐이다.
인천시는 88올림픽을 전후해 차이나타운을 전통중국음식점.한약상가.중국전통문화관이 들어서는 관광명소로 가꾸기 위한 계획을 세웠으나 예산 2백여억원을 확보하지 못해 지금껏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仁川=鄭泳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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