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포럼] 검찰과 프로크루스테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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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프로크루스테스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악당이다. 그는 크고, 작은 두 개의 침대를 가지고 있어 지나가는 사람들을 강제로 거기에 눕혔다. 큰 사람은 작은 침대에 뉘어놓고 침대보다 길면 긴 만큼 길손의 팔다리를 잘랐다. 작은 사람은 큰 침대에 오르게 한 뒤 길이가 맞도록 몸을 잡아 당겼다.

그런 악질이 환생해 대통령의 측근비리 수사 결과를 평가하는 잣대로 횡행하고 있으니 여간 아이러니가 아니다. 지난 연말 청와대 홍보수석은 대검 중수부의 수사 결과에 대해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사지를 맡기는 듯한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 침대가 큰 침대인지, 작은 침대인지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유감을 표시한 것으로 미뤄볼 때 큰 침대인 게 분명하다. 검찰 수사가 실체적 진실 규명과는 거리가 먼 침소봉대이자 무리였다는 시각이 담겨 있다. 검찰 인사권을 쥐고 있는 대통령을 지근에서 보좌하는 청와대 측이 검찰을 향해 불만과 불신을 노골적으로 토로한 셈이다.

청와대도 검찰이 못마땅한 판국인데 대선자금 수사의 집중 포화를 맞고 있는 한나라당은 할 말이 더 많을 성 싶다. 이제는 한나라당이 프로크루스테스를 동원할 차례다. 그동안 수사 과정을 보면 10대 그룹에서 받은 불법자금은 이회창 후보 캠프 5백80여억원 대 노무현 후보측 70여억원 안팎이다. 한나라당이 엄청난 돈을 끌어모으는 사이 盧후보 측은 과연 푼돈만 받았을까. 후보 단일화 이후 盧후보 대세론이 이어지는 동안 대기업들이 손을 놓고 있지는 않았으리라는 게 국민 대다수의 생각이다. 한나라당이 줄기차게 불공정 수사라고 주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대통령도 "우리는 티코를 타고 어렵게 기름을 넣으며 대선 가도를 갔지만, 리무진을 타고 유조차로 기름을 넣으며 달린 쪽이 훨씬 많이 썼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盧후보 측의 불법모금 액수가 지금쯤은 국민이 납득할 만한 수준으로는 밝혀졌어야 한다. 아직 가시적인 성과가 없는 것을 보면 검찰이 수사를 제대로 하는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수사의 지침이 될 법한 티코급에 맞추려 조사를 소극적으로 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검찰의 이상기류를 엿볼 수 있는 시중의 풍문을 믿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한나라당에 건네 준 자금만 집요하게 캐묻고 盧후보 측에 대해서는 질문조차 않았다거나, 모 대기업의 경우 불법으로 제공한 돈을 절반으로 줄여줬다는 소문이 나도는 연유를 검찰은 파악하고 넘어가야 한다.

검찰은 작은 침대 위에 큰 덩치를 올려놓고 튀어나온 부분을 제거하는 잘못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 속칭 '살아있는 권력'인 대통령을 염두에 두고 만의 하나라도 편파적으로 수사할 경우 엄청난 역풍을 만나게 된다. 대통령 측근 비리를 비교적 적나라하게 파헤치면서 모처럼 얻은 국민의 신뢰가 하루아침에 물거품으로 바뀔 수 있다.

국민이나 야당이 수긍할 만한 결과를 내놓는 최상의 방도는 공평무사한 검찰권 행사밖에 없다. 검찰은 형평성 시비에 대해 파편만을 보지 말고 나중에 전체를 본 뒤 평가해달라고 요청한다. 하지만 수사의 양상도 결과 못지않게 중요하다. 쇼핑백 더미와 차떼기, 채권 다발 등 한쪽의 기상천외한 수금 수법은 속속 드러나 부도덕성이 집중적으로 부각되고 있는 데 다른 쪽은 겨우 영수증 미발급이 고작이다. 물론 임기가 4년이나 남은 정권을 의식한 기업체 임직원의 진술만을 쳐다보는 고충은 이해가 된다. 굳게 닫힌 그들의 입을 열게 하는 다양한 기법은 국가 최고 수사기관의 몫이고 책무다. 절차가 정당하고 결과가 편향적이지 않다면 프로크루스테스식으로 키가 크냐, 작으냐고 이의를 제기하더라도 검찰은 떳떳할 것이다.

도성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