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cover story] "자석들 안 내려오는 집이 제일 가난하지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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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고향, 설레는 마음들

일년 3백65일 노랫가락과 어깨춤에 들썩이는 소포리지만, 설이며 추석 같은 명절은 각별하다. 외지에 흩어져 사는 '자석들(자식들)'이 돌아오기 때문이다. 서해안 고속도로가 뚫리기 전엔 서울서 스물네시간은 좋이 걸리던 귀향길. 관광버스를 대절해가며 고향에 오던 자석들. 부모 손을 잡고 강강술래를 돌고, 함께 농악을 뚜들고(두드리고)…. 동네 잔치도 그런 잔치가 없다.

'소포 어머니 노래방'을 만들어 엄매(아낙)들에게 육자배기 등을 가르치느라 한 세월을 훌쩍 보낸 한남례(70) 할머니가 노랫가락에 맞춰 뚜둥뚜둥 북을 뚜들다가 한숨 돌린다.

"아이고, 오날은 쩜 뻗치는구만(오늘은 좀 피곤하네). 갱번(갯벌) 가서 꿀(굴) 잡아왔어야."

40분 동안 거룻배를 타고 사공과 번갈아 노를 저어가며 굴을 따러 갔다왔단다.

"아, 추워도 멀리 가야 꿀이 좋응께 그라제." 설에 찾아올 5남매와 손자.손녀들에게 먹일 굴이기에 눈바람이 쳐도 아랑곳 않고 호미로 파고 또 팠다는 할머니. 소포리 갯벌은 모래 하나 섞이지 않은 '찐뻘'이라 외지 사람은 들어가면 도로 나오지 못할 정도로 푹푹 빠진다. 굴이 가득한 대야를 갯벌 위로 끌고 나오는 길이 어땠을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그래도 할머니는 "꿀로 떡국을 끓이면 겁나게 맛있어부러"하며 즐거운 표정이다. 시루떡.가지 나물.엿.손두부…. 노래방에 모인 엄매.아배들이 덩달아 주워섬기는 설 음식들로 네평 남짓한 노래방이 그득하다.

1년에 명절이 몇 번이나 될까만은, 바쁜 도시 생활을 하다 보면 한해 두해 고향길을 미루기 일쑤다. 소포의 자식들이라고 해서 크게 다를까.

"아, 당연시리 설되면 오제."

"참말로 자석이 안 오면 설 음식은 멀 할라고 한다냐."

열둘이 둘러앉은 노래방이 시끌해진다. 효자.효녀들을 의심하는 기자가 괘씸해서다. 김연호(57)씨가 타이르듯 말을 꺼낸다.

"그라제(그렇지). 다들 바쁘제. 그래도 자석들이 명절에 시골에 안 내려오면 그것처럼 부모가 (마음이) 가난한 게 없지라. 자석들이 옹께 설이 걸고 풍성한 거라."

하지만 올해는 6남매 없이 혼자 차례를 모셔야 하는 이원심(75)할머니 같은 분들도 있다. 너무 바쁜 자식들을 위해 할머니께서 설 전에 아들.딸네로 가서 얼굴을 보고 왔다지만 혼자 맞을 설이 행여 허전하진 않을까.

"쓸쓸하긴 뭐이가 쓸쓸해! 동네 사람들 다 모여 노는데 재밌제. '아이고 좋다!' 그러면서 다들 노래부르고 놀지라. 닭쌈도 하고, 씨름도 하고…."

올 설에도 차례를 모신 뒤엔 어김없이 날이 저물고 별이 뜨도록 동네 사람들이 한데 어우러져 민속 놀이를 할 것이다. 설 다음날인 23일엔 모두 어울렁더울렁 배를 타고 섬을 한바퀴 돌면서 소포리 풍악을 들려줄 참이다.

줄다리기도, 물레타령도 소포에선 아직 살아있다. 도시에서 온 손자.손녀들도 곧잘 따라한다. 컴퓨터 게임과 TV에 젖어 살았어도, 소포의 피가 흐르는 아이들은 "할부지.할머니한테 귀염 받으려면 그랑 것도 다 해야제"하는 말에 가락을 흥얼거린다고 한다.

이런 소포도 예전 같진 않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잘 놀고 잘 웃는 소포 사람들도 조금씩 변했다.

"전에는 설을 닷새씩 쉬았어. 근데 요새는 정월 초이틀만 되면 대파밭에 일하러 나가제. 초하루부터 나가는 엄매들도 있구먼."

먹을 만큼만 짓던 농사가 팔기 위한 농사가 되면서부터다. 규모가 늘다 보니 아쉬워도 노는 시간을 줄일 수밖에 없었다. 대파 농사가 한창인 요즘은 밤에 어울려 노는 일도 뜸해졌다. 예순이든 일흔이든 밭에 나가 농사를 짓는 이들의 손은 다들 불긋불긋 텄다.

"그래도 우덜이 얼마나 편한 줄 아는가. 농사 따북따북 져서 가득가득 담아놓고 창고창고 재여 놓응게."

새해 소원을 묻자 이들은 바라는 것이 없다며 웃음을 짓는다. 몸만 건강하면, 숨만 크게 쉬면 된다는 것이다. 로또 당첨되면 좋지 않겠냐고 묻자 노래방이 껄껄 까르르 웃음에 묻혔다. "로또? 하이고, 그랑 건 바라덜 안해. 사람은 의식주만 있으면 되는데 다 쓸데 없는 욕심이여."

그런 말 말고 노래나 한자락 더 부르자며 다들 고쳐 앉는데 최경례(58.여)씨가 나지막히 말했다. "그저 자석들이 건강하고 잘 되는게 젤이지라."

방에 앉은 엄매.아배들이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람 그람(그럼 그럼)."

"그저 자석들만 잘되면 되지라."

"그라지라…."

진도=구희령 기자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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