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측의 남북정상회담 연기 요청 내막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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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오는 28일로 예정된 남북정상회담을 10월 초로 한달여 연기하자고 18일 제의해 왔다.

갑작스런 연기 요청의 배경을 놓고 정치권과 북한 전문가들 사이에서 다양한 해석들이 나오고 있다.

관계당국을 포함해 대부분 전문가들은 수해복구를 위해 시간이 필요하다는 북측의 설명에 공감하는 분위기이다.

하지만 정치권과 일부 남북문제 전문가들은 "대선 정국에 영향을 미치려는 노림수가 깔려 있다"는 해석도 내놓고 있다.

남북이 합의한 새로운 회담 일정이 노무현 대통령의 임기를 코 앞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회담 연기는 대선은 물론이고 기존의 정상회담 관련 합의사항 이행에 상당한 변화를 줄 가능성이 높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적인 분석이다.

◇수해 때문인가=청와대와 통일부 등 관계당국은 "수해 외에 다른 이유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며 정치권 일각에서 제기되는 이른바 '불순한 의도설'을 일축했다. 천호선 청와대 대변인은 18일 오후 긴급 브리핑을 통해 "북한의 수해 피해가 상당히 심각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다른 의도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고 밝히고 선발대 파견 등 관련 일정을 재조정해 나가면서 준비를 착실히 해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재정 통일부 장관도 "북측은 그동안 노무현 대통령의 방문을 성과적으로 보장하기 위해 성의있는 노력을 해왔으나 천재지변에 의해 합의한 일정을 연기할 수 밖에 없게 됐다"며 북측의 설명을 인정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실제로 최근 폭우로 인한 북측의 피해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심각한 수준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통일부에 따르면 북한은 지난 7일부터 대동강 중˙상류에 쏟아진 집중호우로 주택파손 6만3300여 세대, 건물 파손 3만여 동, 철도˙교량 유실 610여개 소, 농경지 수만 정보 침수 피해를 입었으며 200여명의 사망˙실종자가 발생했다.

특히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는 평양의 경우 460mm 이상의 폭우가 쏟아져 대동강과 보통강이 범람, 보통강호텔. 능라도 5˙1경기장, 창광원 등 저지대가 침수되고 일부 지하철 운행이 중단되는 등 도시가 심각하게 훼손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는 지난해 7월 북한이 입은 수해의 두 배에 가까운 수치로, 당시 수해 복구에 수개월이 걸렸던 점을 감안한다면 이번 피해 복구에는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현재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군 인력을 동원해 복구 작업에 나서고 있지만 도로 유실로 복구 장비의 동원이 쉽지 않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주민들을 남북정상회담 준비에 동원한다는 것은 북한 당국으로선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수마가 할퀴고 지나간 수도 평양의 모습을 남북정상회담 취재를 위해 몰려든 언론들에게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도 부담이 됐을 것으로 분석된다.

북한은 이날 김만복 국가정보원장 앞으로 보낸 전통문에서도 "큰물 피해를 복구하고 인민들의 생활을 안정시키는 것이 급선무"라고 양해를 구하면서, 수해 복구 외에 다른 이유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또 "남북정상회담 개최에 대한 북측의 입장에는 변함이 없으며 실무준비접촉 결과도 그대로 유효하다"고 강조했다.

◇대선에 영향을 미치려는 노림수인가=한나라당 나경원 대변인은 "대선을 코앞에 둔 10월에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함으로써 북한이 대선에 영향을 끼치려는 것 같다"고 주장했다.

수해만을 이유로 남북정상회담을 갑자기 연기한 것은 석연치 않다는 것이다.
한나라당은 특히 대선후보를 정하는 경선을 하루 앞두고 북측이 정상회담연기를 요청해 왔다는 사실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한 남북문제 전문가는 "수해가 벌어진 것은 오래전 일인데 중요한 정치일정을 코앞에 두고 정상회담 처럼 중차대한 일정을 연기요청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수상치 않은 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남측 대선에 적극 개입하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는 해석이다.

남북이 합의한 새로운 정상회담 일정은 범여권의 국민경선(9월15일부터 10월 14일) 사이에 놓여있다.이와관련 북한이 올들어 "남한에서 보수정권의 탄생을 막겠다"는 입장을 여러차례 밝힌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전문가들도 있다.

정상회담의 효과 극대화와 남한정권 흔들기 차원에서 이 문제를 보는 전문가들도 있다.
남성욱 고려대 북한학과 교수는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남한 정세에 정상회담의 ‘임팩트’가 별로 크지 않은 때문이 아닌가 싶다. 열흘동안 남측 여론을 보니 1차 때처럼 큰 붐이 없어 10월 초로 연기한 것이 아닐까 싶다”고 말했다. 남 교수는 또 “1995년 열흘동안 비가 쏟아졌지만 그래도 평양은 마비되지 않았었다. 이번에도 비가 많이 온 것은 사실인데, 이것만으로 정상회담을 연기할 수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또 익명을 요구한 한 남북문제 전문가는 “지난주 북한이 첫 준비접촉을 뚜렷한 이유 없이 연기했는데 이는 남한을 흔들 수 있는 적기가 아니라는 판단이 든 것으로 풀이된다”며 “북한은 한나라당이 독주인 상황에서 이에 제동을 걸고자 정상회담이라는 카드를 썼는데 예상외로 호응이 적어 추후를 기약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또 “남ㆍ북 간 이면 조율 과정에서 협상 주도권을 갖지 못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힘들다”고 덧붙였다.

임봉수. 이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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