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칠지도, 백제의 하사품인가 조공품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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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지난 14일 일본 나라(奈良)의 국립박물관.

이곳 박물관 동(東)신관에서 지난 4일부터 열리고 있는 '칠지도(七支刀)와 이소노카미(石上) 신궁의 신보(神寶)'특별전시전에는 일본 국보인 이 칼의 위용을 느끼려는 관람객들이 끊이지 않았다.

칠지도. 길이 74.9cm. 나라현 덴리(天理)시 이소노카미 신궁의 소장품인 이 철제 칼은 몸 좌우로 가지 모양의 칼날이 3개씩, 그리고 위에 하나의 가지가 있어 총 7개의 칼날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칠지도다. 50대 후반의 한 자원봉사자는 "간사이 지방에서는 칠지도가 10년 만에 일반에 공개(도쿄에서는 2000년에 공개)되는 때문인지 칠지도 앞을 20~30분간 떠나지 않고 감상하는 관람객이 많다"고 소개했다.

그동안 "백제가 왜왕에게 하사(下賜)한 것"이라는 한국 측 주장과 "헌상(獻上)한 것"이란 일본 측 주장이 날카롭게 대립해 왔기 때문인지 유리 진열장 밑 작품소개란에는 "양면에 61자(字)가 금상감(金象嵌.글자를 파낸 뒤 금을 밀어넣어 새긴 것)돼 있으며 백제에서 왜(倭)로 건너왔다는 사실이 표기돼 있다"는 매우 조심스러운 해석을 달아놓은 것이 눈에 띈다. 배경을 묻자 이번 칠지도 전시전의 실무 책임자인 이노구치 요시하루(井口喜晴)상급연구원은 "어느 것이 진실인지 모르는 상황인 만큼 표현 하나하나를 두고 고민 끝에 '모타라세타(건너왔다)'란 용어를 쓰기로 결정했다"고 털어놨다.

이노구치 연구원은 그러면서 일본 고대사의 권위자인 도호쿠(東北)대 구마가이 기미오(熊谷公男)교수가 2001년 펴낸 '오키미(大王)에서 덴노(天皇)에'란 책을 펴보였다. 구마가이 교수는 책에서 "칠지도는 양국의 대등한 국교수립을 기념해 백제 왕세자가 왜왕에게 선물을 보냈다고 보는 게 맞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박물관 측이 펴낸 전시회 안내책자에는 "일본서기에 따르면 백제로부터의 '헌상'으로 돼 있다"는 부분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어 언뜻 보면 '이중 플레이'로 여겨지기도 한다.

마침 이날 오후 2시 칠지도 작품 앞에서 '갤러리 토크'가 열렸다. 관람객들이 칠지도에 관한 설명을 박물관 관계자로부터 듣는 행사다.

설명을 맡은 이노구치 연구원은 매우 조심스러워했다. "칠지도가 헌상품이건 단순한 선물이건 간에 백제 왕세자가 왜왕을 위해 칠지도를 만든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는 정도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나라=김현기 특파원, 조민근 기자

*** 61字 새겨진 백제의 칼…1874년 日서 발견

◇칠지도란=1874년 이소노카미 신궁의 궁사 스가 마사모토가 처음 발견했다. 10년 뒤 중국 지안에서 발견된 광개토대왕비와 함께 고대 한.일관계의 '수수께끼'로 양국 학계의 끊임없는 논쟁의 대상이 돼 왔다.

칼의 앞면에는 '泰O四年O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鋼七支刀(出) 百兵宜供供候王OOOO(作)'라는 34자, 뒷면에는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라는 27자가 각각 금으로 상감돼 있다('O'는 판독 불가, ( )안은 다른 글자로도 볼 수 있음). 해석을 두고 많은 논란이 있지만, 국내에서는 대략 '백번 제련한 쇠로 칠지도를 만들었으니 온갖 병사를 물리치리라. 후왕에게 적합하다. 백제 왕세자가 왜왕을 위해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여 보이라'는 뜻으로 보고 있다.

일본학계는 '일본서기' 신공황후 52년(252)조에 백제왕이 왜왕에게 칠지도를 바쳤다는 기록이 있는 점을 들어 이를 조공품으로 해석했다. 나아가 4세기 후반 이후 왜군이 한반도 남부를 통치했다는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을 입증하는 유력한 증거로도 내세웠다.

국내 학계에서는 1963년 북한학자 김석형이 "칠지도는 황제의 지위에 있던 백제왕이 아랫사람인 일본의 '후왕(候王)'에게 '하사'한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았다. 이후 두계 이병도도 백제의 왕자가 왜왕에게 내린 것이라는 견해를 제시했다. 최근에는 일본에서도 '백제 헌상설'을 주장하는 학자는 드물다. 대신 백제가 대등한 입장에서 선물한 것이라는 '증여설'등이 힘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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