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 기사(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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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승패는 병가의 상사」라고들 흔미 말하지만 현대사회의 프로세계에 있어서 승리와 패배는 흥망을 확연하게 갈라놓는다. 승자에게는 박수갈채가 쏟아지는 반면 패자에게는 동정과 연민의 눈길만 쏠리게 마련이다. 뿐만 아니라 승자와 패자에게 돌아가는 상금의 몫에도 엄청난 차이가 있다. 스포츠에서는 승부를 가릴 수 없는 경우가 종종 생기지만 프로바둑의 경우엔 그런 일이 좀처럼 벌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욱 냉혹한 프로의 세계를 실감케 한다.
바둑은 본래 「지혜의 싸움」으로 일컬어져 왔다. 5천년전 중국의 요순시대에 그들의 어리석은 아들 단주와 상균에게 지혜를 심어주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바둑의 유래로서도 뒷받침된다. 그래서 프로기사가 되기 위한 두가지 조건으로 우선 머리가 좋아야 하고,그 다음엔 승부사 기질에 투철해야 한다는 점을 꼽는다. 그래야 3백61로의 오묘한 미로를 헤쳐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두가지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기사들은 그리 흔치 않지만 바둑이 프로의 경지에 이를 정도면 무엇보다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여야 한다는 점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대부분의 프로기사들은 여러가지 방면에서 재능을 갖고 있게 마련이다. 학문이나 지식과는 다른 차원일 수도 있지만 그들이 일찌감치 승부의 세계를 포기했더라면 그 방면에서도 뛰어난 성과를 거두었을 사람이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엊그제 여류 프로기사 남치형양이 서울대 영문학과에 합격한데 이어 문용직 4단이 서울대에서 정치학박사 학위를 받게 됐다는 소식은 우리나라 프로기사들의 두뇌 수준이 어느 정도인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들이 계속 학문적 길에 정진할는지,양쪽 병행해 나갈는지 아직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작년에 한국의 프로바둑이 세계대회를 석권함으로써 입증됐듯이 우리나라 프로기사들은 세계 어느 나라,어느 분야와 겨뤄도 뒤지지 않으리라는 점이다.
그러나 사람이 두가지 이상의 재능을 갖는 경우 그 재능의 분산이 염려되고 두가지 이상의 일에 함께 몰두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 우리를 아쉽게 한다. 그래서 문 4단의 경우 앞으로 「박사인 기사」로 불리게 될 것인지,「기사인 박사」의 길을 걷게 될는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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