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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가요박물관 하나 없는 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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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어느 누구나 자신의 직업에서 존경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노랫말을 만드는 일이 직업인 나에게는 가장 생각나는 분이 박춘석 선생님이다.

선생님은 '섬마을 선생님''흑산도 아가씨''가슴 아프게''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초우''공항의 이별' 등 제목만 들어도 가슴 저려 오는 주옥 같은 명곡들을 만들어 지난 수십년 동안 우리 삶의 애환을 어루만져준 분이다. 하지만 나이 지긋하신 분들을 제외하고 요즘 朴선생님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朴선생님은 해방 직후 경기중 시절 교내 경음악단을 결성해 음악을 시작하신 후 50여년간 한결같이 연주가로서, 작곡가로서 대중에게서 큰 사랑을 한 몸에 받아 왔던 분이다.

이런 선생님이 요즘 대중의 관심을 뒤로 한 채 혼자 쓸쓸히 10여년째 병마와 싸우고 있다. 왕성히 활동하던 시절의 다정한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 가끔 전화했지만 그마저 언어장애까지 겹쳐 통화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아픈 몸을 후배들에게 보이는 게 싫다며 찾아오는 사람들도 다 물리치고 오로지 혼자 힘겹지만 기품있는 투병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 선생님의 형제분과 전화 통화를 했는데 朴선생님이 창작 활동을 하실 때 쓰던 소품이나 물건.악기들을 잘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언젠가 선생님을 기억하고, 선생님이 만드신 노래들을 추억하는 사람들이 선생님의 향기를 맡고 싶을 때 직접은 아니지만 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보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들으면서 역시 거장들의 생각은 다르다는 느낌을 받으며 한편으론 한없는 부끄러움에, 다른 한편으론 초라한 현실에 가슴이 시려 왔다.

선진국 대부분엔 가요박물관이 있다. 이곳엔 현재 활동하는 분들은 물론 작고한 가수나 작사.작곡가들이 창작 활동을 할 때 쓰던 악기.오선지 같은 유품들이 전시돼 손님들을 맞이한다. 대중가요에 관심있는 사람들에게 평소 좋아하던 가수나 작사.작곡가들의 아름다웠던 작품세계와 시간들을 추억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는 것이다. 비틀스의 악보가 새로 발견되거나 관련된 자료들을 모아 자료관을 여는 일이 연일 해외토픽에 나오고 엘비스 프레슬리의 기념일이 대서특필되는 것처럼 우리도 이제 한국 서민을 위로했던 대가들의 기록들을 조사하고 보존할 필요가 있다.

한국 음반시장 매출액은 세계 10위권이다. 또 최근엔 한류를 타고 중국.일본 등 여러 나라에 문화상품을 수출하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둘러볼 가요박물관 하나 없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현실을 감안해 우리 시대의 거장들이 아직 생존해 계실 때 그들의 삶의 그림자와 창작 관련 자료들을 체계적으로 수집해야 한다. 멋들어진 가요박물관이 건립돼 정서가 메말라가는 세상에 좋은 노래 한 곡을 들으며 그때 그 시절을 회상해 볼 수 있다면 그 얼마나 멋스러운 일인가.

안경 너머 지그시 미소를 지으며 항상 후배들에게 따뜻한 말로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던 박춘석 선생님. 예전에 작품을 함께할 때 어린 나에게 미안해하시며 어렵게 하시던 말씀이 생각난다. "노랫말이 참 좋아. 근사한 곡으로 만들었는데 가수가 취입할 때 발음하기가 어려워 두 글자를 고쳤어. 괜찮겠지?"선생님은 이렇게 자상하시면서도 세심하신 분이셨다. 지금 병상에서 선생님이 바라보고 있을 창 밖에 눈이라도 펑펑 쏟아졌으면 좋겠다. 그 눈과 함께 선생님의 생전에 제대로 된 가요박물관 건립 분위기가 싹트고 눈사람을 만들듯 그런 염원이 큰 덩어리로 뭉쳐져 갔으면 좋겠다.

이건우 작사가

◇약력=▶1961년 경기도 평택▶80년 '종이학'으로 데뷔▶'파초' '날개 잃은 천사' '사랑은 아무나 하나' 등 1천여편의 노랫말 작사▶현 한국음악저작권 협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