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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황순원 문학상 최종 후보작 지상중계 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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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세상 먼저 뜬 큰 누님, 오랜 친구
“인생이 있긴 있나” 시인의 번뇌

유난히 고단했나 보다. 문인수 시인에게 지난 1년은, 험하고 힘겨웠나 보다. 시인이 한 해를 보내며 내려놓은 시편을 따라 읽는 일은, 당신의 아픈 기억을 들추는 것처럼 가슴 시렸다.

지난해만 해도 이렇지 않았다. 시인은 예의 날카로운 언어로 얄팍한 세상살이를 꾸짖었고, 삶의 생생한 기운을 능청스레 노래했다. 환갑 넘은 나이는 문인수란 시인과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다.

하나 올해의 시편은 어둡다. 우울하고 슬프다. 시인은 한 해 동안 42편의 시를 생산했다. 이 가운데 한겨울 섬진강변에서 지켜본 되새 때의 모습을 분 단위로 묘사한 ‘새떼’ 연작이 10편이다. 이 열 편을 제외한 32편 중에서 죽음이 직접 등장하는 시가 12편이다. 나머지 20편에서도 상실의 정조가, 그에 따른 허망한 심사가 새벽 안개처럼 잔뜩 드리워져 있다.

어찌 보면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한다. 올 초 시인은 오랜 친구를 잃었다. 고(故) 박찬 시인이다. 친구의 갑작스런 죽음을 지켜보며 시인은 세 편의 시를 썼다. 앞세운 친구를 애도하는 마음보다, 어찌하다 남아버린 친구의 비애가 되레 도드라진다.

‘도대체, 인생이 어디 있나, 있긴 있었나 싶을 때가 있다./나 허물어지는 중에 장난치듯/한 죽음이 오히려 생생할 때 그렇다.’(‘오후 다섯 시-고, 박찬 시인 영전에’ 부분)

시인의 주변에서 죽음은 또 있었다. 지난해 시인의 큰 누님이 돌아갔다. 한데 아흔여섯 연세의 어머니는 여전히 곁에 계신다. 이 난감한 상황이 안타까운 시 한 편을 또 낳았다.

‘큰 누님 저 세상 갔다./향년 76세, 삼일장을 치른 뒤 우리 남매 어머니한테 갔다./활짝 반기면서 어머니는 대뜸,/하필 내게 물었다./“느그 큰 누부는 안 오나……?”(약속대로 우리는)나는, 딴청을 피며 어물쩍 넘겼다./…/큰 누님 안부, 다시는 한 번도 잠잠 묻지 않는다.’(‘뻐꾸기소리’부분)

시인의 형제는 당신의 자식이 먼저 간 일을 알리지 않았다. 혹여 노모가 쓰러지실까 저어한 때문이었다. 어찌 된 일인지, 당신은 딱 한 번만 첫째 안부를 물으시곤 다시는 첫째를 찾지 않았다.

시인은 “당신께서 알고 계시는 것 같다”고 말했다. 형제 중에서 가장 자주 얼굴 보이던 첫째가 어느 날부터 나타나지 않는 걸 보고, 다른 자식들이 애써 무언가 감추는 걸 알고 당신께선 이내 받아들이셨던 게다. 꾹꾹 삼키고, 또 삭히셨던 게다.

문태준 예심위원은 “시인의 심정을 드러내는 시어라면 아마도 ‘소실점’일 것”이라고 소감을 전했다. 그 ‘소실점’이 앞서 옮긴 시편에서도 보인다. ‘새 길게 날아가 찍은 겨자씨만한 소실점, 서쪽을 찌르며 까무룩 묻혀버린 허공처럼/하루가 갔다.’라고 시인은 적었다. 시인은 자꾸, 먼 허공만 바라보고 있다.

다음번 시인을 만날 땐 예전의 그 얼굴로 돌아가 있기를, 혼자서 빈다. 목이 메어 혼났다.

글=손민호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시시한 청춘들의 ‘1979년 일상’
79학번 작가가 따스하게 담아내

소설가 성석제에게 ‘여행’이 황순원문학상 최종 후보작으로 선정됐으니 인터뷰를 하자고 했다. 그는 경희궁 터에 자리 잡은 서울역사박물관을 약속 장소로 정했다. 만난 자리에서 “왜 여러 단편 중에서 ‘여행’이 뽑혔을 것 같으냐”고 물었더니 “글쎄, 배경이 여름철이라서 그랬나…”하고 눙쳐버린다. 성석제다웠다.

이번 소설도 하찮은 사람들의 하찮은 이야기다. 배경은 1979년 여름이고, 사건의 전모는 무전여행이란 명목으로 좌충우돌하며 갖은 고생을 하던 주인공들이 명문가 출신의 국립대생들과 벌이는 한판 싸움이다.

다툼 끝에 국립대생들은 “친구가 중앙정보부에 잡혀가 고문 끝에 숨진 게 힘들다”고 털어놓는다. 중앙정보부와 고문. 우리의 주인공들은 전혀 알지 못했던 시대의 아픔이다. 주인공들은 수험 생활을 조금이라도 일찍 끝내려고 적당한 대학에 특차 합격한 뒤 음악다방에서 디제이나 하며 낭만적으로 놀기에 바빴다. 이렇듯 같은 대학생이어도 성석제의 대학생은 다르다. 봉수 패거리는 성석제식 ‘시시한 주인공’의 70년대 버전이다.

예심에서 김동식 위원은 “우리의 70∼80년대는 늘 사회의식을 가진 대학생의 관점에서 서술되고 기억돼 왔으며, 그 기억이 정당하다고 얘기돼 왔다”고 운을 뗐다. 그러니까 “70년대 말 음악다방 디제이와 그 똘마니 친구들이 유신철폐 독재반대 시위하는 대학생들을 바라보며 느끼는 거리감·괴리감을 기록한 소설은 드물다”는 분석이다.

역사에서 79년은 제4공화국의 마지막 해다. 그해 10월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사망했다. 성석제는 ‘유신철폐 독재반대’만 외쳤던 때가 아니라 대학 신입생들이 촌티 내며 좌충우돌했던 시절로 79년을 재생했다. 고단한 무전여행길에서 레토르트 자장 한 봉지에 웃고, 깨진 간장 한 병에 울다가, 싸구려 태양 담배 한 갑을 놓고 다투다 끝나버리는 시시한 주인공들의 시시한 관계가 있었는데, 그때가 바로 79년이었더라는 얘기다.

작가는 사회의 아픔을 이해하는 엘리트 국립대생 보다는 내세울 것 없어 서러운 봉수 일행을 그려내는데 훨씬 공을 들였다. 소설을 읽으며 킬킬거리다가도 슬그머니 짠한 기분이 드는 건, 이 세상의 평범한 대다수를 응시하는 작가의 따스한 시선 때문일 것이다. 79학번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그때도 생활이 있었다. 나이 들어 써먹을 회고담도 없는 평범한 존재들을 기록하고 싶었다.”
 
일찍이 평론가 서영채는 성석제를 가리켜 “거짓말쟁이·허풍선이·만담가”라고 이른 바 있다. 그러나 이 ‘만담가’는 “때묻어 무거워진 것을 복원해 웃음으로 가볍게 만드는 각성의 힘을 중시한다. 환갑 되고 팔순 되도 재밌게 쓰는 것을 원칙으로 삼을 것”이라고 응수한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사는 건 계속되며, 대체로 기록되지 않는다. 그런 삶들을 충실히 복원해 오늘 우리가 만난 저 역사박물관에도 들어오지 못할 개인적인 역사를 쓰고 싶다”고 힘을 줘 말하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성석제도 3년 뒤면 쉰 살이다.

글=권근영 기자, 사진= 김주영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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