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책을 말한다]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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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정재학 지음, 민음사, 6천원

1996년 '작가세계'로 등단한 정재학(30.사진)씨가 첫 시집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를 출간했다. 시집에는 정씨의 등단작 '어머니가…'와 '세 개의 시계' 등 40여편의 시가 실려 있다. 시의 문장들은 전통적 독법으로는 파악하기 어려운 난해함이 있다.

"…누군가 나의 성기를 잘라버렸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목에는 칼이 꽂혀서 안 빠지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그 칼이 내장을 드러냈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표제시 '어머니가…'는 굳이 의미를 꿰어 맞추자면 당신이 암에 걸리고 손톱이 빠지는데도, 제대로 밥이 지어질 리 없는 보잘것 없는 화력의 촛불로 밥짓기를 그치지 않는 어머니, 아들의 목에 칼이 꽂히고 심장이 도려내어졌는데도 계속 밥을 짓는 어머니에 관한 것이다.

'세 개의 시계'의 시.공간은 일상적이지 않다. 화자는 약속 시간에 맞춰 수은독처럼 내리는 빗속에 택시를 잡지만 운전사는 몸을 뒤로 돌려 승객인 나를 보며 운전한다. 얼마나 기괴한 장면인가. 택시는 결국 다른 차를 들이받는다. 다른 택시를 탔더니 외눈박이 운전사가 약속 장소와는 반대 방향으로 달려간다. 결국 화자는 손등에 눈이 있는 기사가 모는 네번째 택시를 타고 약속장소로 달려가지만 출발점인 자기 방으로 돌아와 있다.

정씨는 "등단 전에는 사회 참여적인 시를 쓴 적도 있었다. 그러나 '광장'에 나가기 전에 내 방에 대해 더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며 "결국 지금의 내 시는 초현실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내 자신에 몰두해 파내려가다 보면 근원적인 자아에 닿게 되고 다른 사람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씨는 그러면서 "'어머니가…'에서 어떤 리듬이 느껴지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문학평론가 이경수는 정씨의 시에 대해 "기존의 가치를 전복하는 리얼리즘의 힘을 갖춘, 환상적 리얼리즘이라고 할 수 있다"고 평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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