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시한 고집 이유 뭐였나/신성호 정치부기자(취재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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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추곡수매 문제 등을 둘러싼 이견으로 국회문을 걸어잠근채 볼썽사나운 힘겨루기만 거듭하던 여야가 우여곡절끝에 7일 다시 손을 잡았다. 경위야 어떻든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합의내용을 천천히 들여다보면 적잖은 의구심을 갖게 한다. 민자당이 수용한 야당측의 요구사항이 날치기 추태를 보여준 닷새전에 비해 조금도 다를바 없기 때문이다.
민자당은 그동안 야당과의 협상과정에서 추곡수매량의 확대는 40만섬은 커녕 단 한톨도 있을 수 없다는 단호한 입장을 천명해왔다.
하지만 결과는 야당의 요구를 그대로 수용했고 안기부법 개정문제에서는 그나마 여권내부의 의견조율에도 실패한채 안기부가 여야 합의안에 반박하는 등 진통마저 겪고 있다.
김영삼정부는 출범후 도덕성과 정직성을 강조해왔다. 국민들도 이를 환영하고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던게 사실이다. 그러나 쌀개방 문제가 대두되면서 그같은 신뢰도에 손상을 입게 됐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추곡수매 확대를 둘러싸고 정부·여당은 또 한차례 거짓말을 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당직자들은 『안기부법 개정은 이미 김 대통령이 취임직후 문민정부에 걸맞게 기능과 임무를 조정토록 지시했다』(김영구총무),『쌀시장 개방에 따른 농민들의 아픔을 달랜다는 차원에서 김 대통령이 추곡수매문제 재량권을 갖고 협상에 임하도록 결단을 내렸다』(강재섭대변인)고 강조한다.
그러나 쌀개방은 지난 2일에도 예고돼 있었던 상황이다. 그럼에도 이같은 주장을 펴는 것은 협상결과에 대한 공이 야당의 몫으로만 돌려질 것을 우려한데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다.
반면 야당측은 상당한 수확을 얻었다고 자평하는 분위기다. 추곡수매량 확대를 관철시켰고 논란이 됐던 안기부의 수사권 조정문제도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사실상 백기를 받아냈다는 평가마저 나오고 있을 정도다. 더구나 쌀개방 문제에 대해서도 여전히 공세의 칼자루를 쥐고 있다.
따라서 민자당이 왜 예산안의 법정시한내 처리라는 원칙만을 고수했는지 궁금하다. 이로 인해 「법정시한 준수」와 「협상성과」라는 두마리의 토끼를 모두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국민의 마음을 잃는 사태를 빚었는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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