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교육:상­대만(선진교육개혁:1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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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작은 부국」 만든 기술고교/실업­인문교 7대 3… 나오면 취업/학비도 보조… 꼭 “대학 가야 하나요”/한국,공고 가고 싶어도 못간다/69대 31로 갈수록 인문고만 늘어나
『좁은 국토,분단국(?),내세울만한 부존자원은 없고 인구는 많다. 60년대부터 경제건설을 시작했고,수출에 국가경제의 목을 매고 있다.』
바로 대만 얘기다. 인구 2천2백만명에 국토면적이 우리의 3분의 1쯤 되는 대만은 여러가지로 우리와 비슷한 면이 많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두 나라의 차이는 확연하다.
대만의 1인당 국민소득은 우리의 1.5배가 넘는 1만1천달러. 한국정부는 대외무역 적자 때문에 해마다 쩔쩔 매지만 대만정부는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무역흑자를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다. 대만 경제성장의 견인차는 우리처럼 일부 대기업이 아니다. 「다품종 소량생산」을 앞세운 중소기업들. 이 개미군단이 전세계로 수출하는 질좋은 주문상품들이 대만경제를 떠받치는 힘이다.
대만경제는 세계경제가 불황 파고에 휩싸여도 별로 큰 타격을 받지 않는다. 국가경제가 특정분야에만 잔뜩 기대고 있는게 아니어서 충격이 분산되기 때문이다. 60년대초 비슷한 시기에 경제성장의 불을 댕겼던 두나라는 30년의 세월이 흐른뒤 이처럼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대만의 수도 대북시내 국립 대북공업전과학교 교정에서 만난 이 학교 신입생 여정한군(16)은 꿈에 부풀어 있었다. 대북공전은 우리로 치면 고교 3년 및 전문대 2년이 연결된 5년과정의 직업·기술학교다. 여군은 중학교 성적이 반에서 5등 정도로 상위권이었지만 명문 대북공전은 워낙 경쟁도 세고 우수한 학생들이 많이 몰려 시험을 치르고도 발표 당일까지 가슴을 졸여야 했다고 말했다. 여군은 기술을 익혀 졸업한 뒤에는 전문기술인으로서 평생 직장과 생계를 걱정할 필요없이 사회적 대우를 받으며 살아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변변한 기술 하나 없는 사람은 「식충」 취급을 하지만 훌륭한 기술자는 신주 모시듯 하는 사회분위기 때문이다.
대만 남부 대남시내의 평범한 실업계 고교인 아주공상 컴퓨터실. 호텔 찬식관리과 1학년 정수란양(16)은 40여명의 동료들과 함께 컴퓨터의 키보드를 두드리며 가장 싼값의 재료를 이용해 최고의 요리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열심히 찾고 있는 방법을 열심히 찾고 있었다. 『대학에 가기 위해 인문계로 진학한 친구들이 부럽지 않느냐』는 질문에 정양은 한동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 친구들은 대학에 들어갈 때 또 치열한 경쟁을 해야하고 저는 확실히 직업을 얻을 수 있는 과정에 들어왔으니 오히려 그 친구들이 저를 부러워할텐데요….』 정양의 대답이다.
죽으나 사나,개인의 적성과 능력이 무엇이든간에 무조건 대학에만 진학해야 사람대접을 받고 「제대로 풀린」 것으로 아는 우리의 사고방식과는 근본부터 다르다.
○「기술입국」 목표
대만에 국중학교(우리의 중학교)까지 의무교육기간 9년을 마치면 갖가지 직종의 수많은 직업학교들이 예비 기능인들의 입문을 기다리고 있다.
공·농·상업계의 외에 간호·예능·해양·가사·서비스 등 실생활과 관련된 모든 분야의 전공이 82개로 세분돼 누구든지 마음만 먹으면 뭐든지 배우고 익힐 수 있다.
인문계 고교가 1백86개인데 비해 실업고교인 고직학교가 2백11개,그보다 입학이 좀더 어려운 5년과정의 전과학교가 74개로 인문·실업의 비율은 3.5대 6.5다. 학생수도 23만명대 50만명.
실업고 졸업생중 3분의 1 정도는 전과학교의 2∼3년 과정과 기술대에 진학,고급·전문기술을 익히고 나머지는 곧바로 중소기업 등에 취업한다.
『인문계 고교는 보다 깊은 학문연구를 위해 대학에 진학하거나 졸업후 외국유학을 갈 학생들만 지원합니다. 평생을 살아가려면 누구나 한가지 이상은 기술을 익혀야 하는게 당연한 것 아닙니까.』
대만 교육부 기직사장 박총명씨(52)의 말이다(기직사는 실업고·전문대·기술대 등 기술·직업교육을 총괄하는 부서로 사는 우리의 국).
○인문고 설립 억제
그러나 대만 국민들 사이에 「사람으로 태어나면 누구나 한가지 이상의 기술을 익혀야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기까지는 「기술입국」을 향한 정부의 보이지 않는 땀과 노력이 숨어 있다.
중국대륙에서 쫓겨난 장개석총통 정부가 맨처음 내세운 모토는 「기술입국」이었다. 기술이 모자라,과학이 달려 결국 서구 열강의 침탈을 받았고 모택동에게 본토마저 빼앗겼다는 뼈아픈 각성이었다.
대만도 당초엔 인문·실업계 비율이 7대 3이었고 무조건 대학에 가야 한다는 분위기가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단호했다. 66년부터 정부안에 인력기술처를 두고 장기계획에 따라 차곡차곡 정책을 시행해 나갔다. 인문계 고교설립은 전면 억제됐고 기술계 학교들에는 최첨단 실습기자재가 우선적으로 지급됐다.
공업고등학교에 진학한 학생들에 대해서는 1년에 1인당 1백만원 이상의 학비 보조금을 지급하고 실업계 학생들이 대학에 진학할 경우엔 장학금을 받기 쉽도록 만들었다.
○무기능 20만 양산
10년,20년 정부의 일관된 정책이 진행되면서 대만 국민들 사이엔 「1인1기」 「대학이 능사가 아니라 기술이 있어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자리잡았다.
한국기업들은 요새 기능인력이 없다고 아우성이다. 기업들마다 선금을 주고 모셔가려해도 기계라도 변변히 만질줄 아는 사람을 찾기 어렵다는 푸념이다. 우리보다 국민소득이 높은 대만이 외국인 근로자들로 골치를 썩고 있다는 소식은 아직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대만에는 여러가지 수준과 종류를 망라한 다양한 기술인력들이 넘치기 때문이다.
한국도 한때 「공업입국」의 꿈을 키워간 적이 있다. 박정희정권 당시 공업학교가 정부차원에서 육성됐고 한때는 우수한 학생들이 무더기로 몰리기도 했었다. 그러나 80년대 들면서 군사정부는 좀더 쉬운 방법을 택했다. 급격한 인구증가로 미진학을 중졸자들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자 급한대로 예산이 적게 드는 인문계 고교를 마구 증설하고 대학 정원을 무더기로 늘려준 것이다. 결과는 10년만에 금방 나타났다. 90년대들어 중졸자의 고교 입학률은 거의 1백%를 육박해 고입연합고사가 무의미하게 됐지만 인문·실업고 비율은 70년 55대 45에서 90년엔 69대 31로 구조 자체가 변해 버렸다.
결국 94년 실업고 입시에서 서울지역 공고 지원자 2만4천명중 1만여명은 가고 싶어도 공고를 갈 수 없게 됐다.
결국 해마다 인문계 고교로 진학하는 45만명중 절반 가까운 20만명은 무기능·미진학 상태로 사회로 쏟아져 나오고 이들로 인해 생기는 사회문제들도 넘어섰다.<김석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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