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정부터 앞장서라(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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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쌀개방 문제로 물끓듯 하는 가운데 29일 국회에서 있은 김영삼대통령의 정상외교 보고 연설은 이미 대개 알려진 외교문제보다도 쌀개방문제에 관한 정부의 입장 때문에 더 주목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날 연설에서 김 대통령은 이미 밝힌대로 아태경제협력(APEC)이나 한미 정상회담에서 어떤 합의도 없었다고만 또한번 강조했다.
쌀개방에 확고한 태도를 요구해온 야당측이 이런 대통령의 연설내용에 불만을 품고 한때 불참소동을 벌인 것은 유감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정상외교를 하고 돌아온 대통령이 국회에 직접 나가 보고 연설을 하는 것은 매우 좋은 선례를 남기는 일인데 쌀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더 전면에 표출되고 말았다. 우리 역시 지금 온나라의 이목이 쌀문제에 쏠린 만큼 대통령이 정부입장을 국회에서 좀더 분명하게 밝혔으면 하는 아쉬움을 갖게 된다.
이번 대통령연설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대목은 두가지다.
한가지는 김 대통령이 지난 9월 국회연설에 이어 또 한번 정치권을 질타한 대목이다. 김 대통령은 정치권이 국제화·미래화를 선도해야 한다면서 국력을 소진하는 정치,조그마한데 집착하는 소모적 정쟁과 우물안 개구기식 시시비비를 강도높게 비판했다. 우리 역시 이런 김 대통령의 지적에 동감이다. 김 대통령의 말대로 정치 또한 국제경쟁력을 뒷받침하고 국익을 위한 생산성 경쟁이 돼야 할텐데 우리 정치는 지금껏 그렇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정치권의 문제가 야당만의 책임은 아니다. 대통령이 총재로서 강력한 지도력으로 장악하고 있는 여당이 더 큰 책임을 느껴야 할 일들이고,그런 점에서는 대통령 자신 역시 책임에서 제외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부터는 정치권에 대한 대통령의 이런 문제인식이 1차적으로 여당의 운영과 역할에서부터 구체화되고 나아가 국회운영에서도 달라진 모습으로 나타나기를 기대한다.
또 한가지 연설중 관심을 끄는 대목은 『우리는 지금 모든 분야에서 높은 비용,낮은 능률로 허덕이고 있다』는 지적이다. 대통령은 규제나 절차가 아직도 너무 복잡하고 과학·기술을 너무 소홀히하고 있으며 행정능률과 체제가 구 시대적이라고 개탄했다.
모두 옳은 지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문제점에 대해서는 정치권이 국회에서 제도적으로 시급히 뒷받침할 일도 많겠지만,그러나 기본적으로는 정부가 앞장서서 해결해 나갈 일이다. 김 정부 출범후 규제완화다,행정쇄신이다 하는 노력이 많이 있었지만 실제 아직도 미흡하고 실효가 적다는 것이 중론이다. 행정부의 장인 대통령이 입법부에 나가 이런 점을 지적할 정도로 이들 문제는 심각한 만큼 정부가 특단의 노력을 보여야 할 것이다.
김 대통령의 국회연설이 비록 우울한 분위기에서 진행됐지만 연설에서 보인 문제인식은 시급한 시책화를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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