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EC 지도자회의를 보고…/박춘호교수(시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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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서둘지 말고 진지하게 뛰자/미 경제축 태평양으로 중심이동/농산물 개방 대책 첫 시험대 올라
지난 5일 미국 동부에 있는 매릴랜드대학에서 개최된 아세안(ASEAN) 6개국의 경제현황에 관한 보고회에서는 매우 흥미로운 장면이 전개되었다.
미국의 중견기업인 약 1백명에게 「말레이시아의 높은 노동생산성」,「태국의 미국상품 선호도」,「필리핀의 경제사정 호전」 등을 열심히 홍보한 외교관들은 아세안 각국의 대사들이 아니고 아세안 제국에 주재한 미국 대사들이었다고 한다.
전통적으로 미국은 대서양 국가였고 지금도 분명히 그렇다. 그러나 그 대외무역액은 세계인구의 40%와 GNP의 50%를 가진 아시아쪽이 대서양쪽의 1.5배에 달했으므로 이제 미국의 경제적 관심은 태평양쪽으로 중심이동이 시작된 것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중심이동이지 양자중 택일은 결코 아니다. 이러한 배경에 비춰 이번 시애틀 아태경제협력(APEC) 정상회담의 성과는 매우 크다.
원래 1989년 경제협력체로 시작한 이 조직은 이번 회의를 계기로 정치적 기능까지 겸하게 되었다. 사상 처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지역의 주요국가 지도자 14명이 모였으니 당연히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다.
이번 회의에서 합의된 사항중 가장 핵심적인 것으로는 무역투자위원회의 설치다. 이것은 강제력은 없어도 이 지역내의 무역·투자의 촉진,그리고 관세·통관제도 등의 합리화로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실행상황의 개선을 도모하게 될 것이므로 그 기능의 중요성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한국이 앞으로 2년간 이 위원회의 의장직을 맡게 된 것은 우선 이 지역에서 한국이 그 위상을 인정받고 있음을 말해준다. 한편 의장국으로서의 임무 역시 만만치 않음을 깊이 인식할 필요가 있다. APEC지역은 모든 나라가 모든 일에 완전히 합의하는 장미의 동산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직도 이번 회의에 참석을 거부한 말레이시아 마하티르 총리는 「동아시아 경제회의(EAEC)를,그리고 싱가포르의 리콴유(이광휘) 전 총리는 「태평양­아시아 자유무역권」(PAFT)의 구성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회의의 결산인 「APEC 지도자 경제비전 발표문」에는 우루과이라운드(UR)를 12월15일까지 타결시키도록 최선의 노력을 한다는 대목이 있다. 이는 우리의 농산물 수입개방 반대문제와 관련해 하나의 커다란 과제를 안겨준다.
우리는 일관되게 반대하고 있으나 과연 언제까지 그렇게 할 수 없음을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니 현실에 맞는 대책을 하루빨리 강구할 수 밖에 없다. 이 발표문에 언급된 여타 분야중 교류,교통·통신,환경보호 등에 관한 것들은 각 구성원들의 경제발전단계가 어느지역보다도 상이한 APEC지역의 각국이 깊이 유의해야 할 점들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우리에게 깊이 시사하는 구절이 하나 눈에 띈다. 즉 「지금까지의 우리의 성공은 변화에 대한 우리의 적응능력을 힘입은 것임」이라는 것이다.
역사상 큰 문명이 무너진 예는 많다. 무너진 원인은 모두 변화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21세기는 태평양시대라는 말을 즐겨 쓴다. 21세기는 시간이 되면 오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 태평양시대가 우리에게 안겨줄 기회를 포착할 수 있는 대비가 과연 어느 정도 제대로 되어 있는지 냉철히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세계의 모든 분단국가는 통일되었는데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있는가. 그리고 우리 주변의 후진국들은 우리의 뒤를 바싹 따라오는데 선진국들은 우리를 못따라오게 하고 있다.
이것은 모두 엄청난 변화로 우리를 냉탕·온탕에 교대로 담그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적응하지 못하면 우리는 살아남을 수 없다.
시애틀의 APEC 정상회담은 우리에게 희망과 시련을 동시에 안겨주고 있다. 이제 겨우 사물놀이의 한마당이 끝난 셈이다. 제발 서두르지 말고 겸허하고 진지하게 뛰자.
콘크리트 벽도 문이라고 들이 받던 「캔두이즘」(Con­doism)의 시대는 지났다.
고르바초프는 『인생은 늦게 온 자를 처벌한다』고 했으나 너무 서두른 자도 처벌당한다.<고대 아세아문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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