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적한 성철스님-세속에 얼굴 안비춰..3천배해야 접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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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당시 해인사에는 白龍城(독립선언33인중 한분),宋滿空(禪불교의 대가)스님등 도인들이 있었고 李古鏡스님이 주지였는데 古鏡은바로 性徹을 선방에 들게 했다.
法頂스님은 속인이 선방에 들어 간 것은 우리불교사에서 이것이처음이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 선방에 하루는 해인사 암자인 백련암에 거처하는 河東山스님이 찾아와 승려가 될 것을 권유했으나 그가 거절하자 半강제로 性徹이란 법명을 지어놓고 戒를 줬다고 한다.
性徹은 출가전 결혼했는데 不必이라 이름지은 딸은 여승이 되어오랫동안 性徹의 수발을 들어주었고,그가 입적할때도 곁에 있었다.생전에 性徹은 가족을 두고 승려된 것을 후회않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장사하는데 말야.이쪽에 10원짜리가 있고 저쪽에 백만원짜리가 있다면 백만원짜리를 갖지않겠나.세상 삶이 10원짜리도 안될때가 있거든.내가 보는 것은 돈으로 가치를 칠 수 없는 좋은 길인데 10원짜리 가치가 눈에 띄겠느냐 이거지.알 겠어.』 출가란 조그만 가정과 가족을 버리고 큰 가족인 온 세상을 위해 사는 것.다시 말해 자기를 완전히 버리고 일체를 위해 사는 불교의 참 정신을 설명한 뜻이다.
性徹스님은 1935년 승려가된 해인사 백련암 그곳을 열반한 오늘까지 자리를 뜨지않은「살아서 神話가 된」인물이었다.
나이든 뒤로 1년에 한번씩 건강진단차 上京한 것이 유일한 외출이었다.
송림 울창한 해발7백50m 백련암에 은거한 그는 속인은 물론승려들조차 잘 만나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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