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잃은 인재들(분수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에게 1심에서 실형 3년이 선고됐다. 범법사실이 있으면 죄값을 치르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또 사회는 냉정하게 그 형평성을 저울질하기도 한다. 정 회장은 선고 직후 한동안 법관석을 응시했다고 전해진다. 그순간 그의 뇌리에 교차했을 만감은 짐작하고도 남을 것 같다.
정주영,그가 누구인가. 한때는 「경제대통령」으로 불릴만큼 한국경제를 이끄는 중추중의 중추였던 인물이다. 80세에 가까운 고령에도 불구하고 「30대의 체력」을 호언하며 경제일선에서의 분망한 활동으로 세인으로부터 기대와 부러움을 사던 경제가가 아니던가. 그처럼 당당하던 자신이 하루아침에 법정의 피고인으로 젊은 법관들로부터 실형을 선고받은 초라한 입장이 됐으니 스스로 참담하고도 처연했을 것이다. 그리고 뜻만 세우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것을 성취해 낼 수 있었던 한 시대가 이미 흘러가 버렸음을 실감했을 것이다.
그것을 인식하기까지 1년여의 세월과 엄청난 재산이 탕진된 것이다. 그가 받은 혐의는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과 대통령선거법 위반이었다. 회사돈을 자기 주머니돈처럼 유용했고 회사 직원을 사조직인양 선거운동에 동원했다는 것이다. 지난날 선거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그로서는 그것은 당연한 선거행태로 일말의 거리낌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그도 과거 관행의 희생자라고 볼 수 있다.
무소불위의 권력도 한꺼풀 뒤집어보면 공권력의 동원과 기업 비자금의 엄청난 지원에 의해 탄생한다는 사실에 대한 철저한 인식과 신뢰가 그를 정치입문으로 유도했을 것이다.
돈과 권력,돈과 명예가 함께 따라다니고 공존하던 시대를 마감하는 종막이 국민에게 주는 인상은 서글픔이다. 장자는 한시대의 흐름을 커다란 수레바퀴로,이에 도전하는 인간을 한마리의 사마귀에 비유하고 있다. 금방 깔려 죽을지도 모르고 덤비는 나약한 사마귀로­.
한때 전국민의 기대와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정씨는 법정의 피고인석에 서 있다. 또 한사람 「포철신화」의 주인공으로 그에 앞서 정치에 뛰어들었던 박태준씨는 해외에서 망명 아닌 망명생활을 하고 있다. 이들 둘다 과거의 성취에 대한 자신감이 지나쳐 길을 잘못 선택한 아까운 인재들임엔 틀림없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