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년 핵폭탄 완성설 사실무근”/박 대통령,이휘소박사 전혀 몰라/김씨/재처리시설·우라늄 없어 불가능/오씨
26일 박정희대통령이 역사속으로 사라져간지 꼭 14년이 됐다. 그의 시대의 많은 부분이 아직 비밀의 안개에 싸여있으며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박 대통령의 핵폭탄 개발여부다. 특히 이 문제는 최근 북한 핵개발 문제와 어우러져 관심이 증폭되고 있는 실정이다.
박 대통령이 76년 미국의 압력을 받아 프랑스로부터 핵재처리시설을 도입하려던 계획을 포기한 것은 사실로 미 국회 청문회록 등에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최근들어 박 대통령이 76년 이후에도 계속 핵개발을 추진하여 핵폭탄을 거의 제조할 단계에 이르렀었다는 증언들이 나와 눈길을 끌었다.
선우연 전 청와대 공보비서관은 93년 3월 모월간잡지에 79년 1월3일 박 대통령이 부산 비치호텔 백사장에서 자신에게 『81년 전반기에 핵폭탄이 완성된다고 국방과학연구소장한테 보고받았어. 그해 국군의 날 여의도 행사에서 이를 세계에 공개하겠어. 그리고 그 자리에서 사퇴성명을 내고 물러나는거야』라고 말한 것으로 증언했다. 강창성 보안사령관(현 민주당 의원)도 국방과학연구소에 대한 국방위 국감에서 『78년 9월 박 대통령이 해운항만청장이던 나에게 「국방과학연구소에서 추진중인 핵개발이 95% 진전을 보이고 있다」고 얘기했다』고 밝혔다.
김진명씨가 쓴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라는 실명소설은 『재미 물리학자 이휘소박사가 핵개발을 주도하다 미 CIA 공작으로 살해당했다』는 픽션으로 여기에서 박정희란 실명을 사용했다.
그러나 당시의 청와대 핵심들은 이러한 증언과는 완전 반대되는 증언을 하고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김정겸 전 청와대 비서실장(69·10∼78·10)과 오원철 전 경제2수석(71·11∼79·10)은 26일 『풍설은 모두 거짓말』이라고 부인했다. 김씨는 당시 비서실장으로 70년대 비밀을 거의 쥐고 있는 인물이다. 더구나 오씨(현 기아경제연구소 고문)는 일부 얼굴없는 증언자들로부터 『핵개발의 최고책임자』로 지목받는 사람이다. 다음은 김씨의 증언.
79년 핵폭탄이 거의 만들어졌다는데.
『모두 거짓말이다. 박 대통령은 그렇게 핵폭탄을 비밀리에 만들 의도도 없었고 추진된 것도 없다.』
카터가 미군을 철수하겠다고 했으니 대통령으로선 핵폭탄쪽으로 마음을 돌렸을 법도 한데.
『박 대통령은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바탕으로 우리나라를 지켜야 한다고 믿었다. 미국의 핵우산,미국과의 신뢰가 긴요하지 핵탄 1∼2개가 중요한 건 아니었다. 우리가 미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핵개발을 했다면 한미 방위조약이 흔들렸을 것이다.』
박 대통령은 이휘소박사를 알았나.
『박 대통령은 그를 몰랐다. 물론 그를 만난 적도 없다.』
김씨는 더 하고 싶은 얘기는 정치비사 회고록에 쓰겠다고 했다. 그래서 오씨에게 물어보았다.
「핵폭탄 완성설」이 왜 거짓말인가.
『내가 추진했다는데 내가 아는한 핵폭탄이 추진된 적이 없다. 그 어마어만한 일을 하려면 수많은 사람이 관계되는데 지금 흘러나오는 얘기가 하나도 없질 않은가. 그리고 거의 완성됐다면 그 폭탄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76년에 한국은 프랑스로부터 재처리시설을 들여오려다 미국의 압력으로 좌절된 적이 있다. 그때는 핵폭탄을 만들려던 것 아닌가.
『재처리시설은 경제적·군사적 두개의 목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그때 계획한 시설은 연구용이었다. 물론 이를 군사용으로 발전시킬 수도 있다. 미국은 이를 우려했다.』
그렇다면 박 대통령은 군사용 의도가 있었는가.
『그것은 딱 잘라서 말할 수 없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76년 그 사건이후 우리는 재처리시설은 물론,농축우라늄도 없어 핵탄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안됐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후 핵폭탄이 비밀리에 거의 만들어졌다는 것은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왜 박 대통령은 재차 재처리시설 도입을 추진하지 않았나.
『할 수 없었다. 미국의 압력과 감시가 너무 심했다.』
오씨는 「박 대통령의 의도」에 대해선 확실한 언급을 삼갔다. 그러나 그는 핵문제와 관련해서 76년이후에 대해선 어디에 나가 증언해도 자신있다고 했다.<김진기자>김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