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해는뜨고 해는지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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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제1부 불타는 바다 어머니,어머니(6) 이 무렵에 겪고 있던조선사람의 비참한 생활은 그것을 만들어낸 총독부 통계에서도 나타난다.1932년 조선총독부 통계에 의하면 1922년에는 전무했던 화전민이 1932년에 오면 9만6천2백가구,거기에다 전연토지 다운 토지가 없어 산에서 풀뿌리로 연명하는「순 화전민」(총독부 표현)이 6만5백가구라고 표시되어 있다.
바다를 잃어버린 어부에게는 이제까지 살아오던 모든 종류의 삶의 틀이 아무 의미가 없게 된다.다를 것이 없다.토지를 빼앗긴농민들이 땅 위에서 살아갈 길이란 없다.「춘궁기」라는 말이 처음으로 하나의 명사로서 시민권을 얻게 되는 시기 가 바로 이때다.그 이전에는 조선에 춘궁기라는 낱말이 없었다.
얻어부칠 땅이 있다고 해도 거기에 쏟아지는 고리채에 5할을 넘어선 소작료가 이 무렵 8할까지 치솟고 있었다.
일본으로 일자리를 찾아가던 조선인이 제일 처음 맞게 되는 지원모집이란게 이때 시작되었다.조선사람 스스로가 신문이나 거리의입간판 혹은 삐라 같은 것에 나타난 모집광고를 보고 직접 그 회사의 사업소에 나와 일자리를 찾아 바다를 건너 가는 형식이었다. 그 다음에 나타난 것이 연고모집이었다.이 연고모집은 훗날강제연행과 함께 악용되어 조선사람들을 강제적으로 집단 연행해 가는 형태로 발전하는 빌미를 준 형식이었다.
연고모집이란 이미 일본 안의 어떤 곳에 와서 일을 하고 있던사람이 조선에 있는 누군가를 소개하는 형식이었다.물론 초기에는소개한 사람은 정해진 소개료를 받았었다.소개받은 사람이 독신일경우 3엔에서 5엔,가족이 있는 사람의 경우 는 8엔까지 소개료를 받았다.하는 모든 과정에 일본은 총독부 경무부장이나 해당경찰서장,그것도 아닐 때는 파견되어 있는 헌병 분유소장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것을 의무화시켰다.처음부터 총독부의 관할 아래이루어졌던 것이다.
중국과의 전면적인 침략전쟁을 시작하고 난 직후,조선에서 광범위한 강제연행이 시작된 1939년까지 일본 정부의 비호아래 일본 기업들이 노동자를 모아 가던 방법에는 서로 다른 몇가지가 있었다.제일 먼저 사용한 것이 지원모집이라는 형식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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