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명제국면 빨리 벗어나자(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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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금융실명제의 도입부에 해당하는 실명전환기간이 12일로 마감됐다. 증시와 사채시장을 비롯한 금융충격이 비교적 빨리 가라앉았고,또 가명예금의 실명전환율이 95%에 이른 가운데 우리 사회에 처음으로 실명제라는 새 제도를 접목시키게 된 것은 일단 다행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어떤 비용을 치르고 무엇을 얻었는가를 총체적으로 따자보면 도입단계의 실적을 두고 성공적이라고 평가하는 시각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가를 쉽게 알수 있다. 도입단계의 실명전환 시도가 가명과 차명금융자산의 양쪽을 겨냥했던 사실에 비추어 두가지를 합친 실명전환율은 전체의 반의 반도 못되는 실정이다.
초기의 충격과 비용이 큰데 비해 성과는 천천히 시간을 두고 나타날 수 밖에 없는 실명제의 특성을 감안하더라도 우리가 지난 두달동안 바친 대가는 필요이상으로 커졌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좀 더 충실한 준비작업을 통해 사후적인 보완조치들의 일부만이라도 처음부터 실시했더라면 충격완화 목적의 비용을 훨씬 더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경기활성화의 지연으로 인해 금년도 국민총생산에 차질이 생긴 부분도 엄연한 실명제의 비용항목으로 산입돼야 한다. 고삐없이 풀린 통화를 두고두고 관리해 나가는 일도 무척 부담스럽다. 작년보다 더 심한 저성장의 고통이 너무 많이 나도는 돈에 가려지고 경기침체의 정확한 실상을 우리사회 전체가 몸으로 느끼지 못하는 것도 작은 문제가 아니다.
앞으로 재정·세제·금융·행정규제 개혁의 각 부문에서 추진해야 할 세부과제가 수천건에 이르고 있는 만큼 이들 과제 하나하나의 수행에 들어가는 비용의 축소에 정부는 좀더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실명제는 이제 겨우 도입단계를 거쳤을뿐 정작 중요한 정착단계의 작업은 앞으로 할 일이다. 심는 작업보다 착근이 어려운 것이 실명제다. 금융기관 밖으로 빠져나간 막대한 자금들을 제도금융권으로 끌어들이고,실명제가 의도한대로 탈루세원의 포착률을 높여나가기 위해서는 금리자유화를 비롯한 금융개혁과 세제개혁의 각종 시책들이 실명제 정착에 적합한 토양 조성의 역할이 충실히 해내야 한다. 비자금 등의 비실명자금을 조성할 필요가 없고 무자료거래가 불편해지며 영수증 주고받기가 자연스런 관행으로 여겨지는 사회 전반의 성숙이야말로 실명제 정착의 성공을 보장하는 최후의 충분조건이다.
이제 실명전환의 소용돌이를 빠져나온 이상 우리는 그동안 실명제 치다꺼리에 쏟았던 힘을 경제활성화 쪽으로 몰아가야 한다. 이같은 전환국면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부가 온 국민의 경제적 에너지를 한 곳으로 결집시킬 수 있도록 구체적인 단기과제를 분명하게 내걸고 정부 스스로 이에 매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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